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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사무실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버스킹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냥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더니, "지원금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은 못 하겠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그러시면 하지마라고 말했다. 사람 바뀌더니 지역 예술가들 밥줄 끊기게 됐다는 둥, 버스킹을 죽였다는 둥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생겼고 그 민원은 하필이면 당시 지방선거로 예민한 분들에게 바로 전달됐다. 본의 아니게 내가 심려를 끼쳐드렸다.

울산에도 버스킹 관련 조례가 생겼고 지원 내용이 포함됐다고 들었다. 그런데 버스킹과 지원금은 사실 상호 모순이다.
먼저 버스킹 개념부터 알아보자. 흔히 '거리공연'과 '버스킹'을 혼동하기 쉽다. 필요충분조건에서 버스킹은 대부분 거리공연으로 이뤄지지만, 거리공연이라 해서 다 버스킹은 아니다. 거리는 버스킹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적확한 번역은 '버스킹=걸닢공연'이다.

그런 행위가 거리에서 이뤄진 것뿐인데, 외형적인 모습에 내용적 의미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버스킹을 하는 사람을 버스커(busker)라 부르는데, 이 말은 중세 스페인어 '찾다'의 뜻을 가진 'buscar'에서 유래했다. 이후 이 단어는 구 프랑스어 'busquer'로 변화해 매춘부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됐고, 이탈리아에서는 '얻다(gain)'를 의미하는 'buscare'로 바뀌어 아직도 이탈리아에서는 버스커를 'buscarsi'로 부르고 있다.

말에서 유추해보면 버스커는 거리에서 무엇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이다. 통상적 의미에서의 버스커는 자신의 공연을 통해 행인의 정서적 관심 혹은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팁박스(Tip box)라 부르는 상자 혹은 악기 케이스를 통해 공연에 대한 보상을 관객들로부터 받는다. 버스킹은 거리, 예술가, 관객 그리고 감상비(Tip)를 통해서 규정된다. 거리에서 자발적으로 예술가는 공연을 하고 관객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자발성'이 버스킹 정체성이며 메커니즘(mechanism)이다.

아무튼 피해자(?)들로부터 여기는 유럽이 아니라는 말로 훈계를 받았다. 광장문화나 팁 문화가 없다는 근거는 사실 핑계로 들렸다. 물론 팁을 주는 문화가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서양의 팁과 여기서 말하는 팁은 뉘앙스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밥 먹고 서비스가 좋아서 주는 게 팁이지, 밥값을 팁이라고 하지 않는다. 공연을 보고 내는 팁은 말이 그렇지 사실 밥값에 가깝다. 우리 민족은 본디 감정에 대한 보상을 금전으로 한다. 결혼식, 장례식, 돌잔치 등 감정을 돈으로 표한다. 심지어 어버이날 선물을 나는 돈으로 주었다.

젓가락을 놓는 순간 남은 밥은 음식쓰레기가 된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떠난 공연은 무의미해진다. 밥만 맛있어봐라, "한 그릇 추가요" 하듯 앙코르를 부를 것이며, 미안해서라도 밥값을 낼 것이니…. 차라리 "내 공연은 재미가 없어요"라는 것이 솔직하겠다. 다만 시민들이 공연 같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인색함은 조금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주로 활동했던 지역도 몇 년 전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버스킹을 해야 해서 행사 섭외가 어려울 만큼, 또 버스킹으로 하루 50만 원 밖에 못 벌었다고 투정 부리는 예술가가 있을 만큼, 그 도시가 참 많이도 변했다. 시민이 변해서가 아니라 예술가가 변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말장난이 '요구'와 '욕구'이다. 예술가들이 풀고 싶은 욕구는 관객들의 요구와 맞아야한다. 거리에서 자기 욕구만 풀었을 때,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배설이다.

버스킹 문화가 정착 안 되는 것은 여기가 유럽이 아니라서가 아니고 관객 수준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일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예술만 하는 예술가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버스킹에 대한 지원금은 거리에 일시적으로 화학비료를 뿌리는 것과 같다. 밥도 버스킹도 유기농으로 지어야한다. 맛있기도 해야겠지만, 건강해야하므로. 한 식당에 적힌 글귀가 떠오른다. '손님이 짜다면, 짜다' 언젠가 이 도시에도 문화적 탄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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