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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하였지.

△허영자: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박목월 추천<도정연가〉 <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은의 무게만큼』 소장본 『허영자 시집 얼음과 불꽃』외 다수.
 

박성규 시인
박성규 시인

또 해가 바뀌었다. 해가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씁쓸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의 갈림길에 접어들지만, 나이에 민감했던 부분들을 되새겨 보면 그믐과 정초로 넘어가는 길에 눈썹이 하얗게 쐰다든지 아니면 팥죽을 먹을 때 새알을 먹어야 한다지만 어릴 적에는 나이를 빨리 먹고 싶었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두려운 경우가 더 비일비재하다.
모처럼 식구들과 보문 호반길을 완행열차를 타고 돌았다. 보문에는 자주 가는 곳이었지만 식구가 자주 모일 기회가 없다보니 이런 기회에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어 돌았지만 한 바퀴를 다 돈 것이 이번이 처음이고 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가까운 곳만 찾아 가서 겨우 몇 걸음 걷고는 되돌아온 것이 마냥 아쉽기까지 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야 사람들이 여행지라고 찾아올 만 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늦은 걸음으로 한 바퀴 도는데 소요된 시간이 거의 세 시간 정도였다. 중간정도 지나니 다리가 서서히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수초에는 얼음 꽃이 피어 있었고 주위 풍경 또한 겨울 이미지답게 시원스레 찬바람을 안게 되었지만 다리가 뻐근하다고 멈출 수가 없어 결국 한 바퀴를 돌았지만 잠깐의 휴식을 취하게 만들어준 시비(詩碑)들이 참 고마웠다. 그중에서도 허영자 시인의 <완행열차>가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는 행위를 속도에 맞춰서 비유하고 있다는 점 하나와 지금까지 호반길을 걸어오면서 느끼게 된 감정들과 복합적인 요소가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임종을 맞는 날까지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 중간 지점을 지났을 터이고 머지않아 종착역에 다다를 것인데 근래에는 너무 속도가 빠르다고 인식을 하다 보니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다. 보문 호반 길을 완행열차를 타고 돌면서 서러운 종점이 다가온다 해도 도는 동안의 기분은 돌지 않고서는 분명 나 모를 뻔하였다.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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