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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똑같은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거울을 보다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하얀 머리카락 한올이 반짝하며 눈에 들어온다. 잡으면 놓치고 또 다시 잡고, 오기가 생겨 눈에 힘 주고 가르마를 타서는 꾹 누르며 머리카락을 넘기는 순간, '앗~! 흰마리 좀 봐!' 너무 놀란 나머지 흰머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벌레들로 보였는지 '흰마리'라 잘못 말하고는 다시 조심스레 가르마를 타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흐음.' 세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게 뭐라고 가슴이 콩닥콩닥 이리 놀랐나 싶어 또 이내 웃음이 나와서 큭큭 거리다 그냥 머리카락을 덮었다.

뽑기에는 너무 많게 느껴졌다. 문득, 스무살 어릴적  '나는 예쁘게 늙어 야지' 하고 자주 생각했었던 게 떠오른다. 내가 정의하는 예쁘게 늙기에는 여러 요소가 있었는데 나이든 내 모습에 책임 지기 위해서 젊을 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과 늙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고작 흰머리 몇 가닥으로 아침부터 외마디 비명이라니. 

며칠전 보았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독주회 포스터가 떠올랐다. 3년 전쯤인가? 울산에 왔을 때 모습보다 얼굴에 훨씬 더 세월이 찾아 온 모습이었다. 하얀머리도 감출 필요없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거장의 모습이 공존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5학년 때쯤이니 1990년대 초 그의 울산 리사이틀이 기억난다. 피아노가 문제였던지 연주 중간중간 다시 조율을 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아저씨가 리스트를 거침없이 연주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몇년 전 다시 찾았던 그의 리사이틀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하던 나이든 거장의 모습이, 그러나 군더더기 없이 흐르는 늙지 않았던 그의 음악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리사이틀 제목은 '백건우&쇼팽'이다.

쇼팽하면 요즘 떠오르는 사람은 '초팽, 21세기 쇼팽'이라 불리우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다. 폴란드에서 5년마다 열리는 제17회 쇼팽 국제 콩쿨에 한국인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세번째 우승하며 세계 클래식계에서 이슈가 된 인물이다. 스물 한살 앳된 얼굴의 그는 클래식계 아이돌이라 불리우며 첫번째 앨범 발매 후 수개월 동안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했고 천석이 넘는 홀에서 열린 그의 독주회 티켓은 79초만에 매진되는가하면 그 이후에도 그의 연주회 티켓은 구할 수가 없으니 인기가 실로 대단하다.

올해 1월부터는 쇼팽 콩쿨 수상 이후 처음으로 쇼팽이 없는 프로그램을 연주한다며 '굿바이 쇼팽'이란 제목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의 말 속에서  평범한 이십대가 아닌 그만의 세월이 느껴졌다. 작년 그의 울산 연주회 티켓은 구할 수도 없었지만 사실 사는 게 바빠 보러 갈 엄두도 안 났었다. 내가 기억하는 조성진은, 이십대 중반쯤이었나 친구랑 함께 유학 중이었을 때였다. 동영상의 어떤 꼬마가 모차르트를 기가 막히게 쳤다. 음악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우와~' 둘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꼬마가 조성진이었다.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소리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의 연주를 실제로 듣는마면 얼마나 황홀할까 상상해 본다. 2019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굿바이 쇼팽'을 말하고 거장 백건우는 '쇼팽'을 말한다. 쇼팽이 서른아홉에 요절했으니 그들의 중간쯔음인 내 나이다. 내 나이가 어느새 그와 비슷해 졌다니. 난 이제 쇼팽을 어떻게 연주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참 잘도 흘러 1월도 어느새 끝나간다. 아직 새해 다짐도 못했는데. 작년 이맘땐 무계획을 계획했었는데 나에겐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기도 했고, 버거운 역할들에 치여 나를 위한 무언가를 계획하면 사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많은 것이 익숙해져서 여유가 좀 생긴걸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1월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아쉬워 할 정도가 되었다는 건. 불혹이 눈 앞이니 어릴적 '예쁘게 늙어가기'를 떠올리며 열심히 살고있는 건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되묻고 또 되묻게 된다. 그렇게 아쉬운 1월이 지나간다.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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