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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공개 증언을 한 이후 이듬해인 1992년부터 정부가 각 지역의 읍·면·동 사무소에 '정신대'라는 정신 빠진 이름으로 피해자 신고센터를 설치해 피해 접수를 받았다. 위안부 문제가 공식화된 역사다. 광복 이후 반세기를 침묵으로 일관하다 피해자의 증언이 피를 토하자 움직이기 시작한 게 대한민국 정부였다.

그 당시 정부는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바로 우리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들이 나라가 없던 시절, 성노예로 끌려갔다. 너무 오래 전 일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만 바로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할머니 이야기다. 부끄러우니 가리고 싶었다. 스스로가 감추고 싶었고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아니 어쩌면 스스로의 남은 삶을 위해 감추어야 했다.

감추지 않으면 손가락질 당했고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도 "왜놈에게 몸을 팔았다"고 욕을 들었다. 고려 때나 조선조 때 오랑캐에 당했던 선조들처럼 '화냥년'과 단어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상황으로 이 땅에서 숨 죽이며 살았던 할머니들이다. 바로 그 성노예 할머니들이 이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

"죽기 전에 일본 아베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고 싶다." 마지막까지 명예를 지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1년여의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93세.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한 김 할머니는 15살이던 1940년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 끌려다니다가 8년 만인 1947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19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여성 인권 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위안부 피해 증언을 시작으로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이후 본인의 이름을 딴 '김복동의 희망' 장학재단을 만들어 분쟁지역 아동과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 운동을 이어갔다. 또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해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지낸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 기금'을 발족하기도 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보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여성들을 돕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3명으로 줄었다. 앞서 이날 오전에도 위안부 피해자 이모 할머니가 별세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다음 달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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