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바다를 건너다-인천 소청도등대⑴
안개 바다를 건너다-인천 소청도등대⑴
  • 울산신문
  • 승인 2019.02.13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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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수필가

서해 소청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얼추 열두 시간쯤 걸린 것 같다. 일주일 전, 배표를 예매할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늘 그렇듯이 사는 일은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다. 유쾌한 일이 하나이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이면 패배가 아홉이라고 한다. 우리네 삶에서 행복 불행은 언제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k와 나는 잘 알고 있기에 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옅은 안개가 퍼져 있어서일까. 우리가 건너 온 바다는 몽환적인 느낌을 물씬 자아낸다. 현실 세계가 아닌 것 같은 이 기분은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과 안개 드리운 바다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룻밤을 묵을 민박집도 바다를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다. 

소청도 등대
소청도 등대

# 서해 5도 중 하나, 소청도 가는 여정
방에 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렁 드러눕는다. 새벽길을 나서 다 저녁에 도착했으니 기진할밖에. 두 사람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이 더없이 아늑하고 편안할 수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몸과 달리 마음은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여객선터미널은 평일인데도 북새통이었다. 해상의 짙은 안개로 배들이 제시간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 k와 나는 서울에서부터 새벽길을 달려왔는데 갈지도 못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실은 두 번째 시도였다. 한 달 전에는 풍랑으로 예매한 표가 취소되어 이번에 다시 온 거였다. 풍랑이 일거나 해무로 인해 자주 결항이 되기에 바다를 건너는 일은 표를 손에 쥐고도 배가 떠날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려는 소청도는 서해 5도 중 하나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내가 사는 지점에서 선을 그어보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긴 대각선이 이어졌다. 먼 길이었으나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 타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을 이번에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바닷길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맞춰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생의 후반기를 시작하면서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 턱없이 꺾인 의욕에 우울감마저 슬쩍슬쩍 끼어들었다. 한 갑자 걸어온 생을 되돌아보며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등대를 찾아가는 여행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곳은 대부분 해안가와 섬의 최전방에 자리하고 있어 다니기에 어려움이 따랐지만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다. 등대를 돌며 무기력해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헐거워진 들메끈을 조여 인생 후반기를 씩씩하고 발랄하게 열어가고 싶었다.
 

인천연안부두
인천연안부두

# 짙은 해무에 바닷길 건너기 힘들어
k와 내가 탈 배는 오전 열 시까지 대기라고 했다. 열 시 대기가 오후 한 시로 이어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어느 순간 모니터에 '승선 준비 중'이라는 글자가 꽃처럼 피어 반짝거렸다. 우리는 장장 여섯 시간을 기다린 끝에 소청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결항 되는 배를 보면서도 설마, 우리 배도 그렇게 될까 하던 안이한 마음에서 또다시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던지라,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도 출항의 기쁨에 봄눈 녹듯 사라졌다.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인 k는 지금까지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아래위를 알고 주변을 두루두루 살피며 마음을 다해 사람을 대하니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k에게 우환이 닥쳤다. 우리 앞의 삶은 누구에게나 평탄한 길만 펼쳐 주지 않듯이 지금, 그녀는 인생의 사이 고빗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길에 함께 할 수 있겠냐고 내가 물었을 때, k는 그 누구보다 흔쾌하게 같이 가자고 했다. 약시로 혼자 다니기 불편한 내가 어디를 갈 때 동행할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나도 편해야 하고 상대도 편해야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함부로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 입장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풍랑이 일고 짙은 해무에 배가 나아가지 못하는 바다처럼, 인생의 바다도 마찬가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고 있는 k도 가끔은 현실을 다 떨쳐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라고 별다를까. 삶의 파고를 넘다 보면 누구에게나 해방구가 필요하지 않던가. 그래야 다시 견디고 버틸 수 있으니까. 

섬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k가 그간의 시리고 아린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는 동안 나는 가만히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속말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나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닌가.  

섬마을 민박집에서 소박한 저녁을 먹고 마을 구경을 나선다. 물 울타리 둘러친 작은 마을은 해 질 무렵까지 엷은 안개에 젖은 듯 가라앉아 있다. 방파제 끝에 서서 안개 바다를 본다. 해무는 연무로 바뀌어 있었으나 흐린 하늘 때문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우리의 내일처럼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낀 소청도해안
안개 낀 소청도해안

# 파고 너머 해방구찾는 우리네 삶 같아
육지에 삶의 내력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k와 나는 배낭 하나 달랑 짊어지고 저 바닷길을 건너왔다. 이대로 사나흘쯤 갇혀도 좋을 것 같다. 아니, 그러고 싶다. 어둠이 내리자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혀 물 울타리를 비춘다. 바다도 섬도 고요에 든 시간, 우리는 캄캄한 바다를 응시하며 생각의 바다에 빠져든다. 인생의 답은 저 바다에도, 이 섬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오랜 침묵으로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이번 생은 처음이라,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산다. 굳건한 의지만으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안개 바다 하나씩 가지고 살면서도 아닌 것처럼 살아갈 뿐. 살아보니 쾌청한 날에도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우고, 폭우가 쏟아지다가도 갠 하늘이 나타나기도 하며 때론 스스로 안갯속에 들기도 하지 않던가. 하여 내게 주어진 삶은 안갯속이든 비바람 속이든 그저 그러안고 가야 한다는 것도. 

밤안개로 온몸을 적신 채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바닥만 한 가게에 들러 맥주 한 캔과 소주 한 병을 산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섬마을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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