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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의 날씨지만 푸근하다. 마침 쉬는 날인데다 동곡 오일장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아홉 시 좀 지나 청도 계곡을 따라 운문면을 지나 금천면 동곡 오일장에 갔다. 이런 일정이 잡히는 날은 설레고 행복하다. 

비어있는 겨울의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주변 풍경은 지난 봄부터 가을까지의 화려했던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다. 계곡의 돌과 곡선의 나목이 주는 얼음장 같은 부드러움의 역설 또한 굳어 있던 내 심미안에 균열을 준다. 아름다움을 뒤집으면 시린 아픔이 보인다는 것을 알겠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고 나면 곧 곤두박질이라도 칠 것 같은 운문재의 내리막길은 아슬아슬하지만 다채롭고 때로는 흥미롭기도 한 삶의 여정 같다. 

숲속의 평평한 자리 앞 나뭇가지에는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주인을 기다리는 듯 타월 한 장이 펄럭이고 있다. 개울 옆에 작은 우물을 만든 흔적, 누군가 평상을 빌려준 흔적, 임시 포장마차와 주변의 민박 시설, 이 모두가 깊이 자는 듯하지만 깨어 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한겨울을 가로질러 동곡 오일장에 가고 있다.

운문 댐이 보인다. 가뭄 탓에 바닥을 보는 일이 잦았는데 오늘은 수위가 제법 높아 마음이 한결 편하다. 운문 댐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자리해 많은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댐의 길이가 407m나 되는 국내 최대의 식수원이다. 당시 청도군 운문면 일대 일곱 개의 행정구역 일부가 수몰되었다고 한다. 청정한 주변 환경과 함께 높은 산의 많은 골짜기가 댐에 발을 담그고 있다. 수몰 당시 지역민들의 희생으로 탄생한 댐이라 바라보는 마음이 숙연해진다.  

운문 댐 옆에 '땅과 커피'란 간판을 걸고 실제로 땅과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다. 삭막한 겨울 풍경 속에 움막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 그 위로 솟은 연돌에서 연기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한 폭의 풍경화다. 이색적인 상호 '땅과 커피'는 그 지역의 상황이 반영된 사업 마케팅인 듯하다. 전원주택의 수요가 늘어가는 추세니 그리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 같다. 나도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사장님의 '땅과 커피' 이야기를 듣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알랴. 그러다 작은 땅 한 뙈기를 덜렁 사서 이웃이 될지. 늘 새로운 세계는 엉뚱한 생각에서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

드디어 금천면이다. 깔끔한 현대식 이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아래층 하늘색 유리문에 검정색으로 굵직하게 'Cafe'라고 쓰여 있다. 주변의 고만고만한 건물의 몇 곳에도 ㅇ다방, ㅇㅇ다방이란 간판이 있었다. 금천면의 번화가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면 금천의 유지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비집고 들어와 금천면의 변화가 시작되는 곳이 동곡 오일장이다.

열 시가 되기 전에 콩나물 동이가 비는 겨울의 동곡 장은 1930년부터 섰다고 한다. 활기는 대단하지 않지만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여유가 있다. 촌로는 올망졸망 보따리를 풀어놓고 이웃마을 사람들 안부부터 묻는다. 손바닥보다 큰 생갈치가 생선 가게의 무게를 잡는다. 동태와 꼬막도 있다.  

시장의 한쪽에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 시골 사람들의 겨울 간식인 강정을 만드는 곳이다. 옆에는 곡물을 튀기려는 이들로 줄이 길다. 밤과 작두콩껍질 말린 것, 작두콩, 흰콩, 옥수수, 현미 등 예전과는 다른 것들이 튀밥의 대상이 되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느리지만 시골의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음을 느낀다.    

오일장이라 버섯 종류가 많이 나올 거란 기대를 하고 갔지만 보이지 않는다. 버섯 재배 환경이 과학적으로 바뀌어 겨울에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소비가 적은 시골 장까지는 오지 않는 모양이다. 요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환경에 맞는 사업을 할 수 있다. 시골에서도 관련 작목반원들이 모여 최고를 추구하며 새로운 소재를 찾고 시장성도 연구를 하는 것 같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느 곳에 있든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맛을 아는 듯하다. 오래된 ㅇㅇ다방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상호인지, 옛것이 이 시대에는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금천리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 안으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온다. "어, 어쩌려고?" 외지인인 내가 놀라는 사이 놀랍게도 사람들은 옆으로 비켜서고 자동차는 유유히 지나간다. 여기서는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듯한 묘한 질서의식이 느껴진다. 동곡 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팔지 않는 것이 없다. 과거와 현재를 팔고 미래를 호객한다.

속이 빈 강정의 높은 인기에 용기를 내어 오늘은 나도 동곡 장의 구색이 된다.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는 풍경도 동곡 장에 어울리는 모습일터. 세상이란 장터에 우린 날마다 자신의 삶을 조금씩 내다 팔며 생을 영위하는 장꾼인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를 팔고 미래를 호객하는 모두 같은 처지다. 주변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장꾼의 예의라는 것을 동곡 오일장 사람들은 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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