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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고래는 언제나 혈맥처럼 연결돼 있다. 울산의 고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곡리에 있는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를 작살로 사냥하는 모습 58점이 그려져 있고 이를 근거로 전문가들은 울산이 세계 최초의 고래 도시였다고 보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포경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해양산업으로 서구 해양대국들은 앞다퉈 고래잡이에 나섰다. 울산에서는 그 중심이 장생포로 알려져 있다. 장생포는 1899년 러시아 태평양 포경회사가 태평양 일대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장소로 선정, 고래해체기지가 생기면서 한국의 대표 포경기지로 부상했다. 미국·영국·러시아 등 다양한 외국인이 드나들던 국제적인 포경항으로 성장해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실제로 고래잡이 배들은 장생포보다 방어진항에 선단을 이뤄 포경의 전진기지로 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울산 포경산업의 원형을  한석근 향토사학자의 기록으로 재구성 해 본다. 편집자

방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어업의 전진기지로 탈바꿈되기 이전에는 울산 동면에 속한 방어진 목장이었다. 1910년 조선이 막을 내리고 목장도 함께 패쇄됐다.
신라 시대부터 목장제도를 시행해 왔던 방어진 남목목장은 양정동(현재 북구) 심청골에서 강동 어물리까지 성을 쌓은 것이 제1마성이다. 그후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의 제2마성은 염포삼거리(염포 개항 기념 표지석이 있는 자리)에서 동축사 뒤 마골산정을 지나 쇠평에서 명자산기슭을 따라 미포 내·외리 경계 바닷가(쌍두간)까지이다.

제3마성은 안산밑 홍살문을 지나 말을 몰아 대송마을에 있던 대문안을 거쳐 방어진 대왕암공원이다. 이곳에 몰아넣은 말들을 선별해 동진(슬도)의 성(城) 끝에서 세곡선(목선)에 싣고 좌수영 우수영으로 보냈다. 이처럼 활발하게 군마를 길러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던 남목의 방어진 목장은 지형상 반도였고 울산도호부에 속하던 북목(장기목장) 또한 호미곶이 반도의 지형에 속했다. 남목의 관목관은 북목까지 때때로 순찰했던 기록과 홍세태 시문(詩文)에 많이 남아 있다.

이런 목장지역이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하면서 폐지되고 방어진과 구룡포는 어업 전진기지로 탈바꿈됐다. 실제 방어진항은 1800년 후기부터 일본의 히나세인들과 대마도인들이 내왕을 하고 있었다. 최초의 히나세인이 방어진의 일산만에 나타난 것은 그들이 바다에 설치해 놓은 그물이 태풍에 떠밀려 온 것을 찾으려고 왔던 것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방어진 자연어항을 보고 최고의 항구 조건을 갖췄다고 여러 차례 일깨워 주기도 했다.

작고한 천재동 선생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대마도에서 고기잡던 어부들이 상진쪽 아랫마을 서진포구에 찾아와서 "배가 고프니 밥을 좀 달라고 간청해 보리밥 한덩이를 주면 개 눈 감추 듯 먹어치웠다"고 했고 "동진포구쪽을 가리키며 최고의 조건을 갖춘 포구이니 저곳을 잘 이용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했다. 동진쪽은 위(화진쪽)에서 동진으로 흐르는 냇물이 있었는데 이 도랑을 '목거랑'이라 불릴만큼 개울 폭이 좁아 그렇게 이름 붙인 듯 하다.

# 日人村 등 근대식 현대도시 형성
방어진의 옛시절에는 고깃배를 타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마을도 동진을 비롯해, 서진, 남진, 중진, 내진, 상진, 문재 등 단위 거주자들이 모여 살며 10여 개 마을을 형성했다. 특히 일인이 대거 몰려와서 일인촌이 들어서 목욕탕, 극장, 장도가(간장공장), 상설시장, 청로거리(청등·홍등을 밝힌 거리), 우체국, 경찰서(지서), 읍사무소, 금융기관 등 근대식 현대도시가 형성됐다.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는 매일같이 운반선이 방어진항에서 생선(정어리, 고등어, 학공치 등)을 싣고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오가며 '물 반 고기 반'이던 시절을 풍미했다. 방어진항이 축조되면서 전국 각 연안에서 돈벌이가 좋은 방어진 항구로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배들이 모여들면 자연스럽게 어부들도 찾아와서 배를 타거나 어판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호구지책을 해결했다.

대다수 정어리잡이, 꽁치잡이 배들은 근착선이었고, 저인망선과 쌍끌이선까지 항구는 매일같이 초만원이었고 풍어로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니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돈이 흔하니 자연스럽게 뱃사람을 상대로 술집이 생겨났다. 대부분 일본인인 선주들은 고급 요정을 찾았고, 상대적으로 주머니 사정이 얕은 조선인들은 일반주점이나 목로주점을 선호했다. 그렇게 생겨난 곳이 내진에서 중진으로 오르는 긴 거리로 '청루거리' 혹은 '청로골목'이라 불렀다.
이런 호황에 힙입어 자연스럽게 극장이 생겨나고 금융조합(은행)이 생겨나고 불철주야 흥청거렸다.

# 백두선 4형제, 방어진서 첫 포경 출항
이 시기에 장생포에 러시아가 먼저 '울산구정포해경기지(蔚山九井浦海鯨基地)를 설립했다. 1899년(지존광무3년) 4월 조선의 대한외교위원 정형택(鄭衡澤)과 러시아 대아백작(大我伯爵) 헨리케셸링이 부경기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에 포경기지를 반환케하고 러시아인들을 물러나게 했다. 이 후 자연스럽게 일본이 한반도 연근해 포경을 독점하게 됐다.

그 당시 대다수 목선이던 포경선들은 동해의 극경회유해면, 즉 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유영하던 해역인 울산 앞바다에 포진했다. 천혜의 자연포구들이 만곡을 이루고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곳이 바로 울산 앞바다이다. 염포만, 미포만, 개운포만, 진하만, 낙동강 하구와 영일만 등이 만이 깊고 넓어 고래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며 지내는 가장 서식환경이 좋은 곳으로 극경회유해면이다. 장생포항에서 동해로 고래잡이를 나가려면 방어진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시간상으로 1시간 가량 늦어져 장생포 포경선들이 새벽 탐경을 나가려면 아무래도 방어진항에서 출발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연료적으로 손실이 적었다.

그래서 방어진항에서 포경선들이 야숙을 하고 새벽에 출어하는 경우가 잦았다. 방어진에서 포경선을 처음으로 시작한 선주는 백두선의 4형제들이다. 둘째 천근, 세째 상건, 넷째가 사근이다. 이들의 원적지는 울주 두서면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혹독한 수탈로 참다못해 농사를 팽개치고 호구지책으로 찾은 곳이 동천강 하구 내황이었다. 이곳에 머물다 일제가 기름공장을 짓는다고 하여 부곡동으로 이주해 살며 막노동을 했다.

그들은 어느날 방어진에 가서 배를 타면 돈벌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방어진으로 찾아갔다. 그 연유로 삶의 터를 잡고 뿌리내린 곳이 방어진이었다. 처음은 맏형이 정어리잡이 배에 올랐고 해방이 되면서 포경선에 올랐다. 그 첫 포경선이 어성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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