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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

길상호

그날은 나무와 눈이 맞았다
한동안 뿌리 근처를 서성이며
내가 불쌍한가, 나무가 더 불쌍한가 가늠했다
처음에 잎도 하나 없는 나무쪽으로
연민의 무게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직 어머니가 남아 있고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이제는 바람에도 이골이 났으므로
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의 눈과 마주친 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무는 솜털 덮인 눈, 따뜻한 눈으로
터무니없는 내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우습다는 듯 우습다는 듯
첫눈은 가지마다 내려 쌓였고
그날 겨울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만
나무 밑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길상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우리의 죄는 야옹』.
 

봄은 어디에 있을까?
봄이 오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갔지 싶어 밖으로 나가보아도 아직 찬바람이 불어오고 얼음이 눈에 띄었다. 정녕 봄은 분명 오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봄 타령하는 동안에도 봄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많을 것이지만 냉이 된장국 향내를 맡으며 일찍 봄 맞을 채비를 하는 동안에도 땅속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나무들의 눈들이 수상하기 시작했다. 나무들의 겨울눈을 들여다보노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살포시 감싸주기도 하고 더러는 바람으로 흔들어 깨우기도 하지만 될 성싶은 것은 떡잎을 보면 안다고 그랬는가?
그랬다. 나무의 눈은 벌써 오동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런 나무의 눈에 하얀 눈이 내리던 날 어둡잖은 나의 눈으로 눈 맞추기를 하니 수액으로 봄을 빨아올리는 모습을 나보란양 자랑하고 있지를 않는가.


나무의 눈은 식물의 줄기에 돋아나 장차 자라서 줄기, 잎, 꽃이 될 부분이며, 어린싹을 싸서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눈에는 한가운데에 생장점이 있어서 여름눈은 그해에 자라고, 겨울눈은 여름철에 생겨 그대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자란다. 꽃이 될 꽃눈과 잎이 될 잎눈이 있으며, 하나의 눈에 꽃과 잎 두 가지가 들어 있는 섞임눈(혼아:混芽)도 있다. 또 가지 끝에 생기는 끝 눈과 가지의 겨드랑이에서 생기는 곁눈이 있다.
눈 맞출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내가 겨울눈을 맞이하고 있음은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봄을 기다린다. 어쩌면 문밖에서 서성일지 모르고 아지랑이 속에 숨어서 올지 모르고 우체통에 끼인 엽서를 따라 올지 모르겠지만 기지개를 켜고 이제 봄을 맞으러 나갈 일이다. 봄에게 겨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죄다 일러바치며 앙탈부리고 싶다.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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