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 이씨(鶴城 李氏)는 울산 학성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학성 이씨 뿌리가 깃든 울산에는 이와 관련된 출토유물과 고택 등이 곳곳에 남아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도 그 중 하나다.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조선 중기 봉직랑을 지낸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 박 씨의 묘, 그리고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 황 씨의 부부 합장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이천기 묘 출토복식(2종 3점)은 광다회대 1점, 면포 솜소모자·명주 솜소모자 2점이다. 그의 부인 흥려 박 씨의 묘 출토복식(3종 3점)은 면포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이다.
셋째 아들 이지영 부부 합장묘 출토복식(3종 4점)은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쌍이다.
이 유품들은 1969년 여름 신정동 판교(현 학성고 자리)에서 학교 부지를 조성하면서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것이다.
울주 웅촌면 석천길 32-3에 위치한 '울산 학성 이씨 근재공고택' 7동 또한 학성 이씨 관련 문화재로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3호에 지정돼 있다.
이 고택은 임란공신 이겸익(李謙益)의 후손인 근재공(謹齋公) 이의창(李宜昌, 1725~1781년)이 1765년(영조 41)에 웅촌면 대대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조선 고종 때 한 차례 고치고, 1934년 안채와 사랑채 등이 대대적으로 중수됐다. 현재 건물은 사랑채, 안채, 사당, 아래채, 중문간 및 곳간채, 외양간, 대문간채 등이 남아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중문과 담으로 뚜렷이 나눠져 있으며, 사랑채 앞으로 행랑채와 행랑마당을 둔 조선 후기 부농형 상류주택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채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른 사당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에서 조산인 벼락띵이산(일명 병풍산)이 보이도록 했다. 사랑채는 툇마루를 둔 정면 3칸의 홑집이다. 안채는 오량가구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6칸, 측면 1.5칸의 비교적 큰 건물로, 개인 집에서는 잘 쓰지 않던 둥근 기둥을 전면에 뒀다.
온양읍 남창리의 3·1운동을 주도한 이재락도 이곳에서 살았으며, 울산 유림들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11호 '학성 이씨 현령공파 절송공묘 출토유물 일괄'에서도 학성 이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출토 유물은 학성 이씨 현령공파로 어모장군 용양위좌부장을 지낸 절송공 이충립(李忠立: 1582~1665)의 묘에서 나온 것이다.
이충립의 묘는 본래 울산 남구 부곡동 한터마을 어귀에 위치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울산 정유공장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1988년에 묘를 옮기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유물들이 발견됐다.
발굴 당시에 시신은 미라 상태로 있었고, 유물들도 350년 이상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다. 출토된 유물은 명정, 도아, 부채, 귀이개, 얼레빗, 참빗, 장도, 갓솔, 구의 등이다. 이 유물들은 17세기 전기 양반들의 복식 및 장신구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