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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코앞이다. 북미회담과 중첩된다며 날짜로 시끌하던 전당대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다. 

박근혜 사면 이야기부터 탄핵부정 논란에 최순실 태블릿 PC 조작설까지 등장하는 모양새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대한민국 제1야당의 대표를 뽑는 중차대한 행사에 재를 뿌린다며 흥분하던 자들이 희미한 옛사랑을 소환하듯 아직도 박근혜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형국이다. 

괴뢰도당의 개입설이라는 이상한 공청회로 전당대회 레이스 전부터 초를 친 김진태는 이제 존재감이 사라졌다. 박근혜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고 목을 놓은 오세훈의 마이크 볼륨도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있다. 안철수처럼 정치 초보는 매력적인지 뉴스의 주인공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됐다. 

그는 며칠 전부터 최순실씨의 태블릿 PC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탄핵의 절차상 문제를 '개인적인 생각'으로 에둘러 이야기하면서 슬쩍 증좌로 꺼내놓은 증거1이 최순실이다. 김진태나 오세훈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또 다른 문제다. 문제의 핵심은 탄핵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여서 더 난감해진다. 

황교안이 누구인가. 박근혜 탄핵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질 때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모든 사안을 관장했다. 태블릿 PC가 조작됐다면 그 때 문제를 제기하는 게 맞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검찰과 사법부에선 "황 후보가 당 대표에 욕심을 내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마저 부인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더불어민주당이 김경수 구속을 계기로 사법부 흔들기에 나선 것과 다르지 않다. '5·18 망언'에다 조작설까지 퍼뜨리는 저의는 물론 선거용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지층 결집은 말 그대로 제2 태극기 부대의 결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쯤 되면 전당대회 무용론이 탄력을 받을 만하다. 하는 일마다 스탭이 꼬이는 문재인 정부가 기댈 곳은 북미회담과 그 이후 이뤄질 김정은 답방 등 평화이벤트뿐이었는데 제1야당의 자충수는 그래서 반갑다. 이러니 시중에 자유한국당을 두고 '더불어 한국당'이라는 비아냥이 화자 될 법도 하다.

대한민국 보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자유한국당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이들은 이제 보따리를 싸고 있다. 보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보수 흉내만 내는 이들이 바로 자유한국당이다. 보수가 몽땅 구덩이를 파고 얼굴을 처박은 마당에 그래도 보수의 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나라 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다. 

보수의 가치는 수구가 아니다. 아랫목을 파고들면 우선은 냉기를 피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불을 때 주는 일꾼이 필요하다. 스스로 불을 때고 아랫목을 데우는 보수는 건강하지만 이미 데워진 아랫목을 차지한 채 패악질이나 하는 꼰대는 불 때는 이가 떠나면 냉방에서 얼어 죽기 마련이다. 지금 불을 땔 일꾼들이 사라진 자리에 아랫목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는 꼴이 얼치기 보수다. 그래서 얼치기 보수를 두둔하는 일부 논객들은 "진정한 보수는 아랫목에 있지만 때가 되면 이불 박차고 대문 밖으로 나올 것"이란다. 천만의 말씀이다. 

보수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지켜가면서 개혁을 하려는 세력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움켜쥐고 안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골통이다. 세상과 마주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다. 가치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신념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고 그 힘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동성에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우리 보수는 사실상 길을 잃었다. 진보가 세상이 중심이 됐고 그 위세는 북풍 칼바람도 훈풍으로 바꿀 만큼 내공이 남달랐다. 평창올림픽이라는 기회를 등에 업고 남북의 빗장을 열고 북미 간의 질긴 악연에 다리를 놓았을 때까지는 그랬다. 문제는 내용 없는 화해, 일방적인 평화무드는 우리 사회를 다시 양쪽으로 갈랐고 복지 표퓰리즘과 잇단 경제정책 실패는 진보정치의 지지층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바로 그 장면에서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던 보수는 새로운 활로가 생기는 듯했다. 낡은 정치, 썩은 정치, 패거리 정치를 안주 삼아 씹어 돌리면서도 그 정치로 밥 먹고 사는 정치 평론가들도 새로운 보수의 태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샤이보수'를 이야기하며 지지층 결집을 전망하기도 했다. 

촛불정국이 시작된 지난 3년 전부터 대한민국 보수정당은 정치평론가들의 안주거리였다. 씹어도 뒤탈이 없고 어쩌면 박수를 받을 수 있으니 맘껏 씹고 퉤퉤 뱉어 버리는 대상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자유한국당을 두고 대한민국 보수 정당의 중심이라며 추켜세우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보수 죽이기의 나팔수로 돌변했지만 아무도 그런 그들의 변절을 욕하거나 삿대질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벌어지는 보수의 재건이라면 차라리 보수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보세력을 향해 허구헌날 조작을 이야기하고 종북좌파를 이야기하고, 숨어 있는 민심을 이야기하는 꼴은 딱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보수를 위한다면 얼치기 보수에 대한 양심선언부터 하고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정치 구도가 만들어지고 유권자들의 선택이 필요한 시간에 이 땅의 오래된 보수의 이름으로 깃발 한번 제대로 흔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뒤돌아보면 대한민국 보수정치는 스스로 궤멸하는 과정이었다.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 무렵, 대한민국 보수정치는 정체성을 잃었다. 

공당의 대표라는 자가 주군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단식농성에 들어가는 순간, 보수정당이라는 이름의 정치는 수구골통과 기득권 세력으로 스스로를 규정해 버렸다. 이정현 당시 대표의 국회 단식농성이 정점이었다. 물론 그 이전 이한구를 필두로 한 공천 파동은 한 차례 보수 정치의 균열음이었지만 대표의 단식은 압권이었다. 오로지 박근혜를 지켜내기 위한 단식은 스스로의 정치생명에 자해를 가한 것은 물론 그나마 이어져 오던 보수정당의 간판마저 패대기친 결과가 됐다. 그런 정당이 탄핵정국과 진보의 집권, MB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됐지만 여전히 친박이라는 망령을 버리지 못하고 수구골통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딱하지만 한때 대한민국 보수의 심장이라고 주장하던 정당의 사정이 그랬다. 문제는 이미 시작된 보수 정당의 전당대회다. 정치 애송이인 탄핵총리가 진보정권의 경제 실정을 앞세워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문제는 그 시작점에 가진 착각이다.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이 땅에서 보수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들은 한결같이 수구골통의 가면을 애국심으로 포장했다. 정체성이 없는 분칠한 수구세력은 끊임없이 진화한 진보에 밀려 안방으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 갔지만 숨은 세력이 언젠가 유관순 열사처럼, 이순신 장군처럼 떨쳐 일어나 만세를 외쳐주리라 기대하고 고대하고 갈망하는 착각이다.

자신만이 믿어온 가치와 자신만이 고집해온 관례를 움켜쥐고 안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골통이다. 세상과 마주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다. 그래서 지금 자유한국당이 벌이고 있는 이른바 새로운 지도부 탄생을 위한 이벤트는 스스로 자멸을 재촉하는 난장이 되고 있다. 

정직하게 우리는 그 뜨거운 여름 땡볕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보았는지 이실직고해야 한다. 국민들은 이미 보수의 명찰을 찬 얼치기 보수들이 그 여름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국민을 속이려 들면 그 순간 기회는 사라진다. 

완전히 비우고 다시 시작하는 자세가 답이다. 벌겋게 불타 숯덩이가 된 산불의 현장에서 어떻게 새로운 싹이 나서 꽃을 피우는지 곱씹어볼 때다. 그래서 소멸은 재건의 답이 된다는 진리를 한 번 더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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