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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울산교육 운동장 한쪽에서는 장사급 씨름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천하장사급은 못된다해도 백두급은 실히 되고남을 두 선수가 막 샅바싸움에 이어 본 게임을 벌였다. 바로 노옥희 울산시교육감과 천기옥 시의회 교육분과위원장이다. 관중석에서 관전하는 나로써는 이 싸움이 흥미롭고 희망적이라 여기면서 어느 한쪽을 두둔할 생각도 이유도 없이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갖가지 범법행위로 줄줄이 감옥행이던 때에 비해 얼마나 민주적인 진일보인가? 그래서 싸움이란 단어를 붙이기 죄스런 마음이 든다. 울산교육 사랑싸움으로 받아주시기 바란다. 사실이 그렇다. 장래에 혹 교육을 그르쳐 큰 화를 부를까봐 편작같은 진맥으로 행한 천 위원장의 공개질의도 그렇거니와 이를 받아 똑소리가 나도록 답변한 노 교육감이 이제 교육수장으로의 능력도 나타내줄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정성스레 정화수 한 그릇 놓을 수 있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드리려한다. 나에게 '교육'하면 곧 살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인물들이 무명교사를 예찬한 시를 남겨 후세교육의 길잡이가 된 미국의 반다이크, 독일의 군인 몰트게 원수, 그리고 프라그마티즘, 이른바 실용주의 교육의 태두인 존 듀이의 제자로 반다이크의 무명교사 예찬론을 번역하고 널리 전래시키면서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을 쌓은 오천석 박사다.

먼저 몰트게 원수는 프랑스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보불전쟁 개선장군으로 돌아올 때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나폴레옹이 짓밟아놓은 독일의 자존심을 되살린 이번 전쟁의 공은 내가 아니다. 그 공은 우리 병사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잘 가르쳐준 교사들에게 있다!" 그의 이 말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갖는가를 일깨워준 천하의 명언이었다.

또 '나는 무명교사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로 시작하는 반다이크의 무명교사 예찬시는 전투를 이기는 장군은 위대한 장군이로되 전쟁의 승리를 먼저 가져오는 것은 무명의 병사로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은 이름 높은 교육자이로되 젊은이를 올바르게 이끄는 이는 무명교사이로다. 그가 사는 곳은 어두운 그늘 가난을 당하되 달게 받도다. 그를 위하여 부는 나팔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 없으며 금빛찬란한 훈장이 그 가슴을 장식하지 않도다.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는 그 무지와 우매의 참호를 향하여 돌진하는 그이여! 쉴 줄도 모르고 천년의 원수인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자 싸우며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우도다(후략).

오천석은 무명교사 예찬글에 매료돼 몸소 번역하고는 널리 읽히게 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국장급으로 기용됐을 때 차장급으로 일한적 있었던 그는 존 듀이란 세계교육의 큰 인물을 스승으로 익힌 교육에 대한 학문을 유감없이 활용해 한국교육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이념은 '모두를 우수하게'였다. 그의 교육관은 아마 누대에 이르도록 변치않으리라 믿는다. 그것을 나는 고개숙인 학생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어깨 쳐진 교사를 두고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결코 없는 교육현장이 되어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월 20일자 울산신문에 학성여고 차상옥 교장의 글 한편이 실렸다. '선생님 길들이기'란 제목의 이 글을 나는 읽고 또 읽고 나서 잠시 눈을 감았다. 이처럼 노련한 경륜과 지도력을 겸비한 교장과 이와 같이 재치있게 알아서하는 교사들이 있는 울산 교육계라면 전쟁터나 다름없는 학력경쟁도 능히 선두를 달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울산의 교육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겠다는 흐뭇함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반다이크의 무명교사 예찬론을 다시 꺼내 정독했다. '울산 교육현장에도 지금까지 그랬지만 이제부터 조금만 더 활력을 불어넣어준다면'하고 그런 바람이 들불같이 일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새겼던 것이다.

두 여 장사의 싸움도 머지않아 승패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언제나 새 정책이 나오면 뒷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극렬한 반대가 쏟아져나오곤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지방의회나 기초의회가 출범할때도 그랬다. 교복제도가 바뀔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이 지금은 어떤가? 지방자치는 성공하면서 장래도 훤하게 밝은 길로 달리고 있다. 그래서 반다이크를 한 번 더 내세운다.

새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은 이름높은 교육자이로되 학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이는 무명교사이로다.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는 교사이로다. 그 무지와 우매의 참호를 향하여 돌진하는 그이여! 바라노니 반다이크가 아니더라도 어깨 쳐진 교사들의 등을 토닥거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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