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걷히다-인천 소청도등대⑵
안개, 걷히다-인천 소청도등대⑵
  • 울산신문
  • 승인 2019.02.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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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수필가

소청도에서 맞는 아침이다. 섬에는 전날 들어왔으나 등대는 갈 수 없었다. 안개로 출항이 지연되어 이곳에 닿기까지 한나절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따르기 마련,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마음을 느긋하게 먹는다. 등대 방문은 다음 날, 그러니까 오늘로 미뤄졌을 뿐이다. 

바쁘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뭔가를 채우고 싶어 조바심이 날 때, 자신의 내면과 마주 하고 싶을 때 등대를 찾아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외딴섬에 있는 등대라면 더 좋겠다. 그곳에 가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누리며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또한 등대로 향하는 길은, 세사(世事)에 지친 영혼을 다독일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
 

소청도등대 입구
소청도등대 입구

# 인천 서북방 210㎞ 거리 작은 섬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색다른 기분을 안겨준다. 섬마을의 아침을 보기 위해 창을 여니 어제처럼, 마을은 망사 커튼으로 한 겹 가린 듯 연무를 드리우고 있다. 뭍사람을 경계라도 하는 것인지 섬의 속살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창밖에 눈을 팔고 있는데 식사하라는 주인장의 호출이다. 일정이 빡빡한 것도 아니고 챙겨 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한 몸 단속 하여 배낭 하나 꾸리면 그만이다. 분잡한 도시의 일상을 떠난 단출한 아침이 얼마나 여유로운가. 실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소청도는 인천에서 서북방 210㎞ 거리에 위치한 대청면에 속해있는 작은 섬이다. 조선 시대 명종 이전까지는 소암도라 하였으나 그 후 수목이 무성한 섬이라 해서 대청도와 함께 '소청도(小靑島)'로 불리어지고 있다. 100호 남짓한 마을은 서쪽 끝머리에 등대가, 그 반대편에는 분처럼 하얗다는 분 바위가 있다.    

등대 가는 길은 잘 닦인 임도로 왼쪽에 서해가 펼쳐진다. 날은 갤 듯 말 듯 아리송한데 연무를 뚫고 비치는 햇살이 따갑다. 선도 높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걷는데 k의 얼굴이 한결 밝아 보인다. 덕분에 이런 곳에 오게 되었다며 좋아하니 나 역시 기분이 좋다. 
 

소청도등대
소청도등대

# 그 최북단서 1908년부터 불밝힌 등대
갈래 길에 서서 이정표를 보며 방향을 잡는다. 아진 포구와 탑동 선착장으로 가는 길도 안내하고 있다. 어렵게 온 곳이라 다 보고 싶지만 배 시간에 대려면 그 마음을 접어야 한다. 해풍 맞고 자란 쑥이 길섶에 소복하다. 돌아오는 길에 쑥을 뜯어가자며 k가 밝게 웃는다. 

한적한 섬마을 길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다. 먼저 가려 뛸 필요도, 남의 눈치 살필 필요도 없는 길에서 바다 저편에 두고 온 일상을 생각한다. 생존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지친 삶들이 아른거린다.

오십 분쯤 걸었을까.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 속에서 등대가 어렴풋이 자태를 드러낸다. 서해 최북단에 자리한 소청도등대, 중국과 인천을 잇는 해상과 휴전선 부근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불을 밝히는 등대다. 1908년 1월 1일에 처음 불을 밝혔다 하니 이 등대도 백 년이 넘었다. 

등대가 가까워지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등대길을 순례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묵묵히, 외로움 안으로 삼키며 오랜 세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등대, 그 당당함에 압도되는 기분마저 들기 때문이다. 대문 없는 입구에는 '소청도등대항로표지관리소'라는 목판이 세로로 붙어 있고 참나무, 고로쇠나무들이 내려다보는 굽어진 길을 오르면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청도등대'라는 표지석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 中, 휴전선 인근 항해 선박의 이정표
등대사무실에 노크를 하자, 항로표지관리원 김ㅇㅇ 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어제 잠시 통화를 해서인지 구면인 듯 어색하지 않다. 사무실 창밖으로 망망한 바다만 보인다. 

이곳에 흐르는 공기는 뭐랄까, 복작대는 도시의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잠시 왔다 가는 우리야 이 고적함도 즐김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은 어찌하나. 순간, 감정이입이 되어 살짝 당황스럽다. 세상에는 이렇듯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분들이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현장에 지금 와 있다. 

차분한 목소리의 김 씨는 손수 차를 내왔다.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자, 인천에 집이 있는 그는 부인이 한 번 오려 해도 쉽지 않단다. 배를 타러 나왔다가도 결항 되는 일이 빈번하여 아예 올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쩌다 여기까지 온 내가 괜스레 미안해진다. 가족이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머쓱한 마음에 얼른 화제를 바꾼다. 

맑은 날에는 등대에서 황해도가 보인다고 한다. 황해도라……. 가 본 적이 없어서인가 얼른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지명이다. 자연스레 등대 이야기로 넘어간다. 포항 호미곶에 있는 등대 박물관에서 '수은조식회전등명기'를 보았다고 하자 이곳 등대도 같은 방식의 등명기라는 것이다. 첫 불을 밝힌 이래 지금까지 사용 중이라고 한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등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바다를 비추고 있는 등명기를 보게 된 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밤이면 이 불빛이 바닷길을 30㎞까지 비춘다. 
 

소청도등대에서 바라본 서해
소청도등대에서 바라본 서해

# 서해상 맑은 날엔 황해도가 보이기도
등대 앞에 서 있다. 그 사이 안개가 걷히고 잔잔한 바다에는 봄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등대 난간에 서서 k와 나는 어제 건너 온 바다를 본다. 하룻밤 사이 얼굴을 바꾼 바다다. 연 하늘빛 바다 위에 부서진 햇살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환상적으로 반짝인다. 세상이 날마다 이렇게 반짝인다면 이처럼 아름답게 느껴질까. 

바다에 시선을 던져둔 채, 등대에 기대어 삶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머니의 너른 품처럼 수평선이 펼쳐진 바다는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뭍에서 불쑥 찾아온 길손을 따뜻하게 맞아 준 김ㅇㅇ 씨와 사진 한 장을 찍으며 이곳에 온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섬처럼 스스로를 고립시켜 볼 일이다. 행복과 불행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지도 말자. 안개 바다를 건너 등대를 만나러 온 시간, 그 등대가 내게 속삭인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주어진 삶에 순응하라고. 그러면 마음에 드리운 안개도 서서히 걷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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