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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 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곁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황인숙: 1958년 서울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리스본행 야간열차', 동서문학상(1999), 김수영문학상(2004) 현대문학상(2018)
 

한영채 시인
한영채 시인

이월은 짧아 슬프다. 슬픔이 나를 깨워 순식간에 지나간다. 구정을 시작으로 집안 행사가 줄지어 기다리는 달이다. 입춘이 있고 입춘 지나 아들의 딸이 태어나 기쁨을 주었고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아들이 그 이튿날 건강한 울음을 울었다. 입덧이 심한 며느리를 위해 애쓰시던 시엄니가 아픈 이월에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고, 며칠 있으면 정월 대보름 하루 전 맛있게 삼색 나물반찬과 미역국을 끓여 상에 올리면 필자의 생일이다. 정월 대보름 첫 둥근 달에게 건강을 빌며 부름을 깨고 달집태우기에 두 손을 모아 한해 액운을 날린다. 일주일을 지나 오래 병상에 계시던 친정엄니가 돌아가시고 비가 오고 슬픈 우수가 지나면 파릇한 새싹이 돋을 때 슬퍼서 바쁜 바빠서 슬픈 이월은 간다.


삶은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이 속절없이 흘러가듯 자연의 이치로 돌고 돈다. 어려움을 모르다가 조금씩 알아가는 시기를 지나 힘든 상황이 와도 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으며 시간을 아끼며 보낸다. 갱년기 증상 중에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은 이 밤이 새도록 슬프다. '새벽이 나를 깨우고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나를 지켜보는 이 슬픔이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날이 밝아도 침대에서 눕게 만들어 분명 과로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다시 슬픔이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소리 없이 돌고 도는 삶의 수레바퀴 느닷없이 찾아오는 갱년기 증상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누구에게나.
 한영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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