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회비에 대한 나쁜 기억
육성회비에 대한 나쁜 기억
  • 울산신문
  • 승인 2019.03.1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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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前 울주군장애인복지관 운영위원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던 아내가 기어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내에게는 학창시절 슬픈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 났다. 아내는 교육관련 일을 만날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아픈 기억이 생각난다고 한다. 얼마 전 교육감이 법원에 재판받으러 가는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 때 일이 또 떠올랐던 것 같다. 충북 제천 산골마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아내는 워낙 총명했던 탓에 다섯 형제자매 중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올라갔다.

수업료는 겨우 맞출 수 있었으나 육성회비까지는 버거웠던 것 같다. 육성회비 못낸 빚쟁이로 교무실을 들락거리다 2학년에 올라가기는 했는데, 담임교사가 바뀌자 결국 사달이 났다. 아내의 딱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학업을 격려해주시던 1학년 담임과는 달리 2학년 담임교사는 밀린 육성회비가 줄어들 기미가 없자 아내에게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다. 어머니까지 학교에 가서 통사정 했지만, 결국에는 자퇴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육성회비에 대한 나쁜 기억은 50~60대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슬픈 경험이다. 4차 산업시대인 지금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한글학교가 있듯이, 산업화 세대에게 육성회비는 수업료, 수학여행비, 수업 준비물 등과 함께 애처럽고도 시린듯 아픈 감정이 골골히 배어 있는 서러운 기억들이다. 아침부터 친구들 앞에서 '육성회비 안 낸 놈 일어서!'하는 창피를 당하기 일쑤였고, 공과금 때문에 교무실에 수시로 불려 다니며 꾸지람도 들었다. 집안 사정 빤히 알면서 육성회비 내 놓으라며 아침부터 대거리하다 부모님에게 몇 대 쥐어 박히고, 빈 손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학교를 몰래 빠졌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종래에는 학교에 아예 나오지 않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는데, 내 아내가 그 경우다.

관절염보다 더 시리고 아픈 이런 기억들이 골골히 배어있는 육성회비는 그러나, 얼마 전에야 폐지됐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지금도 이름을 바꿔 달고 우리 학교에서 그 질긴 생명 줄을 이어가고 있다. 육성회비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거친 교육은 더 이상 없지만, 학교운영지원금이라는 아름답게 포장된 그럴싸한 명목으로 아직까지 살아있다. 한 번 바꾸기가 그렇게 힘든 관성, 그게 우리 학교와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교련이라는 교과목으로 군대문화가 학교 교정을 휘젓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폭력이 교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성적으로 줄 세우고, 서울대 진학생 숫자를 최고로 치던 획일적이고 냉혹한, 그런 교육이 이어져왔다. 특히 교육도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다른 지역에서는 진보니, 보수적이니 하며 교육관이 서로 다른 권력이 번갈아 교체되면서 진화돼 왔지만, 우리 울산은 과거의 그런 무참한 교육에서 변화가 더뎠다.

그러다 이제서야,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한 것 보다, 시끄럽고 어지럽더라도 아이들 웃음이 쏟아지는 자유분방한 교실, 시험 점수에 꿈을 끼어 맞추지 않아도 되는 혁신학교처럼, 지금과는 결이 다른 교육이 실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모세대를 괴롭히고 눈물짓게 했던 육성회비 따위가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 무상교육, 학교에서 밥 먹는게 너무도 당연한 무상급식, 수업준비물을 학교에서 챙겨주고 교복조차도 학교가 입혀주는 말 그대로 학생이 주인인 학교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처럼 학교에 대해 딱하고 안쓰럽고 애처로운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 울산교육에 호기심이 많다. 한 번도 안해봤던 교육, 한 번만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교육,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부모와는 다르게 육성회비 따위로 학교에서 쫓겨날 걱정없는 교육, 자녀들만은 성적 대신 소질로도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런 학교를 다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참고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아내는 버스 안내양, 미싱일도 못구해 염소 치는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러다 자퇴소식을 뒤늦게 들으신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아내를 애타게 찾고 계시다는 소식에 친구들 손에 붙들려 학교 교무실을 찾았다가, 그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준비해 놓으신 담임선생님 덕분에 산업체 야간고등학교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야간고등학교 졸업장을 발판으로 직장에 다니며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원까지 무사히 마쳤다.

아내는 그 때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숙자야, (육성회비 때문에 쫓겨날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에게 이야기 하지 그랬니? 배우고자만 하면, 분명 무슨 방법이 있다. 포기하지 말고 힘내거라." 아내는 학교에서 쫓겨나 막막했던 35년 전 그 때, 세상천지 내 편이 돼 주셨던 분은 1학년 담임이셨던 신춘호 선생님 밖에 없었다고, 교육관련 일을 만날 때마다 그 슬픈 기억을 떠올린다. 아내는 지금도 그 때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나누던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을 글썽인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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