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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과는 달리) 돼지는 다행으로 짧아서 곧은 목이다. 고집은 셀지 모르나 좌고우시(左顧右視)의 추태는 있을 수 없다. 목표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직진(直進)할 뿐이다. 그러기에 '저돌지용(猪突之勇)'이라 하야 부탕도화(赴湯蹈火:물·불을 가리지 않음)의 용(勇)과 검산(劒山) 도수(刀樹)를 초개같이 보는 유진무퇴(有進無退)의 용은 오직 돼지에게 있는 것이다.-후략-'


 언론인이었던 설의식(薛義植, 1900-1954) 선생은 그의 수필 '돼지의 대덕(大德)'에서 그 짧은 목을 두고 이렇게 찬양하고 있다.
 돼지라 하면 일반적으로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먹기만 잘 하는 동물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뚱뚱하여 미련할 것 같은 체형적 특징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린 돼지는 그러나 실상은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혜택을 주는 존재이다.


 온 땅을 힘차게 헤집던 네 다리는 얌전한 족발로 화하여 서민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고, 머리는 언제나 고삿상(告祀床)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 항정살, 가브리살, 목살, 갈매기살, 갈빗살, 삼겹살, 낙엽살, 간받이 등 독특한 각 부위들이 서민의 친근한 요깃거리가 될 뿐 아니라 껍데기도 어엿한 메뉴로 개발되어 애주가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또한 뼈다귀는 푹 고아 해장국으로, 창자는 순대로 변신하고 방광은 가난했던 지난 날 시골 아이들 발끝에서 축구공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으며 해학적이고 화끈한 코는 잘려서 나이 들어서까지 침 흘리는 아이들의 목에 걸어 민간 치료요법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신종 플루'로 농가 시름


 이처럼 다리에서부터 머리, 살갗까지 온몸을 바치고도 더럽고 탐욕스런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돼지가 요즘 독감 바이러스의 누명을 쓰고 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근자에 조류 독감으로 닭이, 구제역으로 돼지가, 광우병 파동으로 소가 몸살을 앓더니 또 다시 '돼지 플루'로 인해 양돈 농가와 식당가에 시름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둘러 '신종 플루'로 개칭되기는 했으나 세인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돼지 독감의 환영은 쉽게 가실 것 같지가 않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보면 돼지는 권력에 눈이 먼 독재자로 등장하고, '개·돼지만도 못하다'든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등 무서운(?) 이미지가 있으나 '서유기'에는 친근하고 익살스런 저팔계가 되어 나타난다. 일찍이 돼지는 야생에서 사육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가족처럼 친근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한자의 '집 가(家)'는 집의 뜻인 면(?)과 돼지 시(豕)가 합성된 것으로 보아 돼지야말로 오랫동안 사람과 가장 가까이서 삶을 함께 해온 가축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음에 틀림없다.


 요즘은 애완용 돼지 미니피그를 개발하여 방에서 인간과 일상생활을 하는가 하면 돼지의 몸을 빌려 인공 장기를 생산하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돼지는 사람과 유전자 배열이 유사하고 장기의 크기도 비슷하다는 특징이 줄기세포 배양에 유리한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기까지 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미소 띤 얼굴로 입에는 지폐를 물고 행복해하는 돼지 머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세상의 모든 평화를 한 몸에 안고 걱정거리라곤 없을 것 같던 그가 요즘 들어 부쩍 고뇌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삼겹살 가격이 한 때 금겹살이란 말까지 탄생시키며 주가를 올리더니 일순간에 대외적 네임 밸류가 추락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민식량'돼지 사랑 이어지길

 

 우리네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다산성(多産性)에 복돼지, 황금돼지, 돼지꿈, 돼지 저금통 등 돈공(豚公)의 덕목을 상징하는 미사여구들이 헛된 구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조만간에 국민들의 돼지에 대한 사랑이 다시 저돌적(?)으로 회복됨과 동시에 이번을 계기로 매스컴에서 보도하듯이 돼지고기의 유통 단계에서 소비자들을 울리는 장난 아닌 장난이 없어졌으면 한다.
 어쨌든, 인간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희생하는 효자 돼지의 큰 덕이야말로 감사패를 주어 그 뜻을 기림이 마땅하지 않은가. 질병을 옮기는 무서운 돼지에서 귀엽고 친근한 서민의 돼지, 국민의 식량으로 과거의 명예를 회복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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