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겨울에 지인의 집 제라늄 화분 한쪽에 돋아난 작은 싹을 캐서 가져왔다. 

<어린 왕자>에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예쁜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제라늄은 유럽의 창틀에 흔히 놓여있는, 꽃 색깔도 하양, 분홍, 주황, 빨강 등으로 다채로운 예쁜 꽃이다. 나는 꽃도 꽃이지만 그저 키우기 쉽다는 말에 조심조심 뿌리를 뽑아 들고 왔다. 

사실 난 식물을 키우는 데 젬병이다. 많은 식물들이 내 손에서 시들거나 뿌리가 썩어서 죽어갔다. 안스리움, 고무나무, 크로톤은 물론 신경 쓸 필요가 거의 없다는 다육식물도 살아남질 못했다.

유일하게 잘 크는 것이 집들이 선물로 받은 산세베리아인데, 산세베리아는 하도 잘 자라 벌써 여러 번 분갈이를 하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 뒤 용기를 내서 화분 몇 개를 들였는데 그것들도 결국 잎끝이 마르고 시들어 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빈 화분에 어린 제라늄을 심은 뒤 제대로 활착을 하는지 걱정이 되어 틈만 나면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어린 싹은 잘 적응하여 잎을 키우고 가지를 벌더니 드디어 꽃대가 올라왔다. 오글오글 거품 같은 꽃눈이 점점 커져 작은 방울처럼 부풀었다. 언제 꽃을 활짝 피울까. 제라늄이 여느 식물처럼 시들지 않고 잘 자라 꽃 피울 준비하는 것이 대견해서 화분에 뿌리를 내릴 때보다 더 뻔질나게 베란다를 들락거렸다.

꽃대가 올라온 지 보름쯤 됐는데도 꽃망울만 감질나게 조금씩 커질 뿐이라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봄비가 흠뻑 내린 아침 드디어 초록 꽃받침 사이로 하얀 치맛자락이 살짝 비친다. 원래 어미 꽃이 핀토화이트로즈라는 하얀 제라늄이라 하니 우리 베란다의 제라늄도 순백의 레이스 같은 꽃을 활짝 피우리라. 올봄은 제라늄 꽃이 피는 걸 기다리면서 벌써 화창해져 간다. 

그런데 마침 어떤 분한테 화분 가꾸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어머니는 봄이 되면 여러 개의 화분에 흙을 담아 옥상에 놓아둔단다. 그러면 흙 속에 있던 것인지,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씨앗이 싹 터 흙 위로 올라오는데, 어떤 싹이 올라올지, 그 싹이 어떤 꽃을 피울지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의 늘그막의 취미생활이란다. 그리고 그것이 민들레든 괭이밥이든 한갓 잡풀이라도 가끔씩 물을 주고 두고 보며 즐기다가 가을이 되면 시든 풀을 거두고 봄에 다시 새로운 흙을 담는다고 하였다. 아, 이런 기다림도 있구나.

어린 시절 오빠들은 뒷산에서 작은 알들을 주워와 짚 검불을 깐 상자 안에 넣고 헝겊을 덮은 다음 아랫목 이불 밑에 두었다. 나는 어떤 새가 깨어날지 안달을 하며 몰래몰래 들여다보곤 했다.

만히 만져보면 아랫목에 데워져 미지근한 알들이 팔딱팔딱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매끄럽거나 거칠거칠하거나, 단단하거나 바스러질 듯 말랑한 느낌이 들던, 하얀색, 연한 하늘색, 검은색 점들이 찍힌 작은 알들. 그 알들에서 깨어날 작고 어린 새. 한 번도 부화에 성공한 적은 없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하도 강렬하여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것은 내가 작은 알에서 어떤 새가 나올지 조바심치던 것처럼 어떤 우연, 어떤 놀라움, 어떤 신비와 경이로움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오늘 아침 보니 저도 첫 꽃이라 오래 기다리며 몸살을 해온 제라늄 옆에 무언지 모를 작은 싹이 났다. 조심조심 올라와 아직 허리도 채 못 편 물음표를 닮은 싹. 예전 같으면 사정없이 뽑아 버렸겠지만 이제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한다. 흙만 담은 화분의 지혜를 빌리기로 한다.

사실 어린 싹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그물맥의 싹이 작은 숟가락 같은 잎을 팔 벌리듯 벌리고 있다면, 나란히맥의 싹은 여린 잔디 싹 같은 것이 머리칼처럼 올라온다. 그것이 열무가 될지 비름이 될지, 강아지풀로 자랄지 바랭이로 자랄지 지켜보는 것은 '하얀 꽃 핀 것은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라는 시처럼 이미 정해진 것, 예견된 것, 예컨대 제라늄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 

이런 기다림엔 낯선 것에 대한 두근거림이 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작은 열망이 있다. 우체부를 기다리며 동구 밖으로 난 먼 길을 내다보는 설렘, 생일 아침의 선물 상자와 같은 즐거운 상상이 있다. 그건 무심한듯하면서도 강렬한 기다림으로, 생명에 대한 경외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기치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 이 작고 소소한 장치들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빛나게 하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게 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