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페이지 터너
조력자, 페이지 터너
  • 울산신문
  • 승인 2019.03.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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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피아노학원장

함께 음악 공부를 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며 귀국 음악회를 연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은 금방 언짢은 마음으로 바뀌었다. '페이지 터너'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서 피아노 연주자 곁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페이지 터너'라고 한다. 속칭 '넘순이'라 부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절대 자신이 돋보이면 안 된다. 청중에게도 자신을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가 인사를 할 때도 페이지 터너는 눈에 띄면 안 된다.

피아노 연주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에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악보는 당연히 볼 줄 알아야 하고 연주자의 연주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연주할 동안에는 움직일 수도 없고 악보를 넘기는 시점과 태도도 모두 연주자의 호흡에 맞춰야한다.

악보를 넘겨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악보를 제때 잘 넘겨주어야 하는데 그 제때가 쉽지 않다. 악보의 마지막 마디가 시작할 때를 넘기는 때라고 하지만 느린 곡이라면 마지막 마디가 시작한 후에도 끝까지 악보를 볼 수 있는 여유를 연주자에게 주어야 한다.

친구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는 책을 영어로 '페이지 터너'라고도 한다. 그만큼 걸림 없이 매끄럽게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연주자가 최상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라벨의 피아노 3중주를 연주하던 악기들이 거침없이 마지막 음을 낸다. 고요했던 무대 위는 함성이 메워지며 더욱 강렬해진다. 친구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나는 친구를 위해 조용히 무대를 벗어났다.

우리의 삶 속에 숨어 말없이 인생의 페이지를 넘겨 준 많은 페이지 터너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모든 희생을 감추고 자식을 돕는 우리의 부모님이 그렇고, 좋은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 밤낮 연구를 아끼지 않는 많은 스승들이 그렇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기부하는 많은 봉사자가 그렇다.

어디 사람만 그러하랴. 자연도 마찬가지이리라. 하늘은 비를 뿌려 새싹을 돋게 하고 따뜻한 공기로 꽃을 피우며 뜨거운 태양은 열매를 익힌다. 혼자 빛나던 태양은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밤하늘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며 기꺼이 조연의 삶으로 돌아간다.

들판의 곡식이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거기엔 바람이란 페이지 터너가 있다고 믿어도 좋으리라. 아름다운 노을도 먼지가 산란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어둠이 되기도 하고 바람이 되어 주기도 한다. 또한 별이 되기도 하고 파도가 되기도 한다. 몸을 드러내지 않는 조력자가 있기에 너와 나의 연주는 언제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소나타를 연주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주연이 되고 싶어 하고, 빛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 시대에 타인을 위해 박수 한 조각이라도 기꺼이 내어주자. 이 봄, 눈길 한 번 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해 피는 꽃들이 찬란히 터져 나오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연이자 훌륭한 연주자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