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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고 있는 들판에게

이건청

들판이 하나 젖고 있다
목이 마른 들판 하나가
남풍에 몸을 맡긴 채 비를 맞고 있다
봄비에 젖고 있다
어디선가 노고지리가 운다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끼리
오는 봄을 먼저 보려고
발뒤축을 들고 서 있다
일렬로 서 있다
우리들의 마른 들판 하나가
쟁기날을 기다리면서 젖고 있다
상추싹도, 연초록 아욱싹도
오고 있다. 실비 속에
마른 들판 하나가 젖고 있다

△이건청(李健淸):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외.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박성규 시인
박성규 시인

삼월 들어서 비가 잦다. 비가 자주 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너무 건조하여 한 해 농사를 망친다고 몸을 조렸는데 올해는 수시로 비가 내려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도의 숨을 쉬는 봄이다. 내친 김에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두엄을 내고 밭을 갈았다. 며칠 만에 끝내고 나니 앞일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3월에는 농사일을 시작하기엔 이른 시기다. 노지에선 꽃샘추위 때문에 꿈도 못 꾸는 일이다. 4월 들어서도 눈 내리질 않았나. 남들보다 먼저 푸성귀를 먹고 싶은 마음에 재작년엔 비닐하우스를 조그마하게 지어 두었고 구정이 지나자마자 바로 상추, 쑥갓, 아욱 등 몇 가지 씨앗을 뿌렸더니 찬 공기가 쑹쑹 드나들어도 싹을 틔어서 제법 줄지어 서 있다. 마음이 흐뭇하다.


그러는 사이 온 들판을 점령하였던 까마귀 떼들이 서서히 물러났고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논에다 두엄을 뿌리고 논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비가 어느 정도 내려서 들판이 젖었기 때문이리라. 경칩이 지났으니 머잖아 개구리도 제 세상 만난 듯 폴짝폴짝 되겠지. 벌, 나비들도 꽃을 찾아 날아다니겠지. 비록 지금은 볼 수 없는 노고지리도 이 땅 어디에선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테지.


여유로운 마음에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거니는데 작년 가을부터 비워둔 화단이 엉망이다 싶어 내친 김에 미리 손질이나 해 두자고 다가갔더니 화단은 벌써 봄 잔치로 야단법석이다. 어느 틈엔가 제비가 날아와서 꽃을 꽂아두고 갔는지 제비꽃이 방긋이 웃고 있다. 반반한 묘목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화단인데 화단 식솔들은 달콤하게도 연초록 꿈을 꾸고 있다. 며칠 후 또 비가 온다고 하니 이번에는 어떤 연초록이 자리를 잡을까. 남풍에 몸을 맡긴 화단이나 벌판이나 젖어서 기쁜 봄이다.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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