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낯선 반가움
아주 낯선 반가움
  • 울산신문
  • 승인 2019.03.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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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길 시인·평론가

얼마 전, 목화솜 같은 포근함 시새움 하듯 봄비가 왔다. 아침에는 겨우내 멀리 물러나 옹색하던 앞산이 청신하고 싱그러운 향기 풍기며 이마 닿을 듯 다가앉았다. 얼핏 달력 보니 우수 경칩도 지나 청명 곡우 빤히 보인다. 그야말로 봄이다. 봄은 새봄, 늦봄 없이 다 좋다. 세상 만물이 무채색 정적인 삶에서 생기발랄한 동적 삶으로 변화 재생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재생은 반복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방식이나 태도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함을 뜻한다. 그래서 새로움 혹은 새로운 시작은 가능성과 희망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우리네 삶을 그야말로 살맛 나게 약동하게 한다.

그런데 이 같은 봄을, 약동을, 재생을, 새로움을 역으로 거부하는 존재를 가끔 본다. 이른바 판을 흔드는 변화의 반대편은 현상유지나 기득권 수호다. 그것이 내세우는 근거는 삶의 안정에, 지금에, 가진 것의 즐기고 누림에 초점이 가 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곶감만으로 매 끼니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안정, 지금, 기득권은 재물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 단지가 아니다. 이들에 매달리면 안주와 나태의 나락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처럼 끝이 죽음인 것은 앞서 언급한 봄을 되살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봄이 되면 대지의 생명은 일제히 새순을 내밀거나 변화한다. 그렇지 못한 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거나 죽은 것이다. 따라서 봄의 이런 필연적 요구는 생명이 자기 생명유지를 위한 본질적 속성이라 하겠다.

20세기 문학판에서 '모더니즘'이란 '새로움'의 상징으로 자타가 손꼽는 작품은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이다. 엘리엇은 전 433행의 이 장시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여기서 시구 '4월'은 '봄' 혹은 '봄비'이다. 왜 그는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가장 잔인하다고 노래하는가? 그것은 '황무지'로 상징된 1차 세계대전 직후 당대인의 삶이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참된 삶으로 거듭나지 못한 즉 본질적 변화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변화를, 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시집을 번역한 황동규는 다른 각도에서 첫 행에 다음처럼 '주석'을 달았다. "가사(假死) 상태를 오히려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 모든 것을 일깨우는 사월이 가장 (잔인한 cruel) 달일 수밖에 없다" 즉 현대인들이 스스로 현실에 안주하여 변화를 거부해서 받는 고통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도 보면, 봄이 '라일락을 키워 낸' 그 땅은 이미 '죽은 땅'이다. '뿌리' 역시 '잠'에 빠졌다. 이 '죽음'과 '잠'은 극복 불가능의 고통스러움을 상징한다. 대지 자체가 생명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키워 낸 '라일락'은 한낱 사이비 재생이며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희망고문일 뿐이다. '잠'만 깼지 '황무지'의 황폐한 현실을 못 벗어났다면 더욱 고통스럽다.

왜 당대인들의 삶이 저토록 절망밖에 없는, 죽음보다 못한 처지, 소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에 내몰린 본질은 어디에 있나? 이미 짐작했겠지만 달콤한 현실에의 안주와 나태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태도와 자기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책 또한 극히 단순하다. 지당하게도 '봄을, 약동을, 재생을, 새로움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의 힘으로 기존의 판을 깨고 뒤집어야 가능할 것이다. 

최근 필자가 나가는 한 모임에서 읽은, 온다 리쿠 소설 『꿀벌과 천둥』(현대문학, 2017)은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무대로 인간의 재능과 노력, 운명 등을 음악 세계를 통해 발현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필자가 무척 흥미롭게 주목한 것 중 하나는 콩쿠르 참가자에 따라 극명하게 반응하는 심사위원들의 태도였다.

기존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연주한 천재는 인정과 거부 둘로 나뉘었고, 수려한 외모, 재능과 대중성 등 상품성을 두루 가졌던 참가자는 결국 1위가 된다. 새로움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새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말, 시인 오창헌의 첫 시집 『해목』(푸른고래, 2018)이 출간됐다. 시인의 세계는 차치하고 이 시집이 소중한 것은 시를 담는 그릇인 책 외양에 있다. 울산은 물론이고 부산 대구 등 주변으로 상당히 넓혀도 처음 선보이는 소위 '누드 제본'으로 되어 있다. 책등에는 제본 풀칠이 다 드러나 얼핏 만들다 만 듯하다. 그런데도 비용은 여타 시집의 세 배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진가 권일과 시인·소설가 이윤길 등의 작품 사진이 양면으로 들어가 기존 제본은 사진을 온전히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집 『해목』은 겉과 속 모두 시인의 메시지를 품은, 근년에 좀처럼 볼 수 없던 새로움을 갖게 됐다. 

이처럼 국가나 사회 집단, 예술, 생명 등 소중한 것들은 모두 의지와 노력이 전제된 새로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해야 반드시 유지되고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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