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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여당의 대표가 의미심장한 사자성어를 꺼냈던 적이 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다. 그는 올해 초 새로운 각오를 피력하며 국민 앞에서 외쳤다. "스스로에게는 더욱 엄하고 국민께는 더 낮게 다가가는 자세로 사심 없는 개혁을 이끌어 국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겠다"는 외침이었다. 바로 박기후인(薄己厚人)이다. 여권의 핵심인 청와대 노영민 비서실장도 비슷한 뉘앙스로 취임 일성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첫 일성으로  "청와대 비서관실마다 '춘풍추상'(남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게 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이라는 글이 걸려있는 것을 봤다"며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되새겨야할 그런 사자성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연말 '만취 상태' 경호처 직원의 시민 폭행과 김종천 전 대통령의전비서관의 음주운전 등으로 인한 국민들의 비판 여론이 높은 가운데 공직기강 확립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기 위한 노 비서실장의 경고였다.

박기후인이든 춘풍추상이든 모두가 제대로 미래를 펼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추문보다 앞으로의 개혁과 발전에 방점을 둔 사자성어이기에 그랬다.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툭툭 던지는 사자성어를 살펴보면 그 또한 대단히 정치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실천이 없다는 의미다. 공자는 정치인들의 말잔치를 '행이불언(行而不言)'이라는 네글자로 경계했다. 행동하지 않는 말은 천박한 정신을 감추려는 분칠에 불과하다는 죽비소리였다.
격동기의 근현대사에 휩쓸린 민족이지만 우리에게는 오래된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최첨단 시대에 무슨 씨나락같은 소리냐고 할지 몰라도 3·1운동 100년과 임시정부 100년을 타고 흐르는 정신적 지주에는 선비 정신이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골수에 흐르는 이 정신의 핵심은 수신이며 제가요 치국과 평천하에 있다. 스스로 당당하기 위해 매일같이 맑은 눈빛을 만들고 자신의 주변부터 책임질 줄 하는 신의성실을 연마하는 것이 나라와 천하를 위한 길임을 선비들은 규칙처럼 연마했다. 그래서 선비들은 남의 단점을 쉽게 지적하지 않았다. 가능한 덕담을 많이 했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는 상대를 선수로 알아보는 것이자 스스로를 상대에 제대로 보이게 하는 마패이기도 했다.

'박기후인(薄己厚人)'이 체질화 된 사람이 퇴계였다. 퇴계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다'는 박기후인을 생활화한 사람이었다. 25년의 연배 차에도 불구하고 8년간 기대승과 서신으로 토론을 마다않은 퇴계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선비의 표상으로 여전히 회자 된다. 퇴계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는 기대승에게 眞勇 不在於逞氣强說(진용 부재어령기강설), 而在於改過不吝 聞義卽服也(이재어개과불린 문의즉복야)라고 에둘러 가르쳤다. 풀어서 이야기 하면 "진정한 용기는 기세를 부려 억지소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고 의리를 들으면 즉시 따르는 데 있다"는 말이었다. 훗날 주자학의 대가가 된 기대승은 어린 제자를 대등하게 대한 퇴계의 인품에 고개를 숙이고 이 말을 일생의 경구로 삼았다.

서두가 장황했지만 핵심은 행이불언이다. 공자는 정치를 몸소 행하는 실천에 방점을 뒀다.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적 자문을 구했을 때 공자는 계강자를 초딩처럼 대했다. 당시 노나라는 먹고사는 일이 어려워 나라 전체에 도둑이 들끓었다. 계강자는 정치를 "도둑을 잡아 벌주는 일"로 인식하고 처방을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계강자의 생각을 저급한 정치라 불렀다. 정치는 정치하는 자가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바르게 해야 백성들이 저절로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답을 바랐던 계강자에게 공자의 답은 초딩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바로 그 지점이었다. 공자는 계강자가 아니라 어떤 이와 정치를 이야기 해도 언제나 초딩 수준의 답으로 좌중을 맥빠지게 했다. 바로 그 공자가 지금 중국의 일대일로에 정신적 지주가 됐다.

청와대의 해외순방 의전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이 반박에 나섰다. 그는 최근 불거진 문재인 대통령의 정상외교 결례 논란에 대해 "상대국가에서는 어떤 말도 없는데 '외교 결례'를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상대국에 대한 결례"라고 주장했다. 탁 위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가 상대국에게 결례를 범했다면 아주 공식적으로 분명하게 상대국으로부터 '항의를 받게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청와대 외교팀의 비전문성 지적에 대해서는 "순방행사의 의전은 외교부의 의전장이 총책을 맡는다"며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은 의전장과 협업해 대통령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외교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순방행사를 맡는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또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외교부와 청와대에 파견된 외교부 공무원들이 전담한다"며 "국내 행사기획과는 업무적으로 분리돼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탁 위원은 "어떤 이유에서든 근거가 박약한 트집은 대통령뿐 아니라 상대국에도 큰 결례라는 사실을 아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의 의전 실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청와대는 지난 15일 문 대통령이 방문한 캄보디아를 소개하면서 대만의 국가양청원 사진을 썼다. 또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의 체코 방문 당시에는 외교부 공식 트위터에 체코의 국명을 이전 명칭인 체코슬로바키아로 잘못 게시했다.

다른 이야기지만 청와대와 관련한 또 하나의 뉴스가 있다. 대마초 밀반입 혐의로 구속된 유시춘 EBS 이사장 아들 논란이다. 자유한국당 김태흠 의원은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 것은 은폐하는 좌파정부 특유의 후안무치 결정판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공영교육방송 EBS의 최고 책임자를 대마초 밀반입으로 실형 받은 사람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임명했다니 이 정부의 후안무치함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고 밝혔다. 유시춘 이사장은 최근 언론인터뷰에서 "아들이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청와대 관계자에게 나중에 모르고 당하면 안되기 때문에 알고 있으라고 일러줬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또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조카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고도, 사실을 은폐시켰다는 주장도 했다. 앞서 유시춘 이사장은 언론인터뷰를 통해 친동생인 유시민 이사장이 아들과 사이가 아주 각별하다며, 이창동 감독과 함께 대법원에 탄원서도 제출했다고 밝혔다.

의전의 문제나 EBS 이사장 아들의 대마초 밀반입 논란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려는 소인배적 성격이 강한 발언들이다. 상대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은 슬쩍 넘어가면 뭐든 괜찮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에 뿌리가 된다.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한 대마초 밀반입 사건을 두고도 결백을 주장하며 싸울 것을 선언하면 사법 부정을 넘어 법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된다. 알렸으니 문제가 없다거나, 최종심이 유죄라도 내가 인정할 수 없으면 죄가 아니라는 식은 초법적 세상을 살아온 자들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반사회적 논리다. 이 정도의 억측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되는 세상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인 사회로 굳어지는 느낌이다. 우리 편의 이야기는 모두가 옳고, 우리 편이 아닌 자들의 주장은 모략과 음모에 불과하다는 식이 보수나 진보 모두에게서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마당에 '지금까지 이런 장관 후보자들은 없었다'고 회자되는 7인의 장관후보 청문회가 시작된다. 청문회장을 말간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지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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