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故 김수영: 1921 서울 출생, 연희전문 영문과,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저거<거대한 뿌리>,  4·19 이후 창작과 번역 등 왕성한 활동 시작, 교통사고로 사망(문인장), 시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시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민음사),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민음사), <김수영전집-한국현대시문학대계24>(지식산업사), 김수영 문학상 제정, 200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한영채 시인
한영채 시인

저녁 8시, 오늘의 뉴스와 타자소리, 기타소리가 봄꽃이 터지듯 어둠을 울린다. 가까이 궁거랑에는 봄밤을 기다리는 벚꽃이 빨갛게 부풀어 하나 둘 폭죽처럼 일어나 밤은 환하고 환하다. 문수로를 지나는 개나리 길은 노랗게 물들어 자동차들도 아기병아리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산언저리에 붉은 동백과 노란 산수유가 마른 가지 주위를 밝히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문수산 꼭대기를 향하여 붉은 기운이 오른다. 봄이 세상밖으로 유혹하는 중이다.


어제는 경주 남산에 다녀왔다. 거친 수피를 가진 나무엔 새싹들이 까칠하게 돋아나고 용장사지를 오르는 길엔 매화가 발그레 피고 소나무 사이 진달래가 한창이며 춘분을 지난 골짜기 물은 졸졸 어린 버들치들이 놀고 있다. 매월당을 찾아 절골 가는 길, 골짜기에 들어서니 움푹 파인 곳에 목 잘린 부처님이 자리하고 계신다. 누가 저 목을 잘랐는지, 누구의 가슴을 치려하는지, 왼손에 약사발을 들고 세상을 치유하러 온 부처, 진달래처럼 처연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봄은 왔는가, 어제나 오늘이나 세상의 어지러운 뉴스가 봄밤을 섬뜩하게 한다. 우리에게 따스했던 날이 또 얼마나 있었던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한지 50주년째다. 시인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언어가 그의 몸이 그립다.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이 시대를 뭐라고 할까 서둘지 마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영감이여, 봄밤은 서둘러 떠날 것 같다. 한영채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