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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을 떠나온 지 일 년 가까이 되고 있다. 이곳 마산에서 적응한다고 바빠서 생각이 없었는데 항상 그렇듯이 떠오르는 옛 추억 속에서 울산이, 그중에서도 우정동이 나에게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 단순한 어떤 사건이었던 것이 아니다. 이제는 떨어져 나가 지금의 연속에서는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를 지배하는 하나의 힘으로써 남아 있다.

물론 추억으로서 있다. 중구 중독지원센터장으로서 근무하던 추억이다. 태화강변에 있는 성남동 버스 정류소에서 내려서 센터까지 걷던 그 길에서 태화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던 기억 등이 사실 지금 무슨 소용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추억에 빠져서 그냥 감회에 젖는 것이 무슨 의미냐 여길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그 당시 '울산 우정동'이라는 글을 썼던 이유는 울산 우정동이 어떻게 나 자신에게 체험되어 의미 있게 되었나 하는 것을 그려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열었기(clearing) 때문에만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다고 하는 것은 꼭 그 대상이 눈앞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정동은 지금 필자의 눈앞에 있지는 않다. 그곳을 지금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신의학책을 읽는 중 책에 쓰인 구절을 생각하다가 이어서 우정동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당시의 우정동의 의미가 우정동과 함께 나의 사색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의 출현을 두고 우정동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은 눈앞이 아니라 그냥 상상의 방식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상상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우정동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예컨대 지금 눈앞의 탁자보다는 뉴욕에 있는 애인에게 나의 모든 에너지가 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우정동도 그렇게 눈앞에는 없어도 나의 실존 가능성으로서 나에게 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그 글에서 "울산에서 제법 살았는데, 우정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이제껏 사실 닫혀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관심을 가질 때만이 그곳이 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을 취하지 않고는 인간은 '실존'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단지 눈앞에 있는 물건들처럼 서로 나란히 놓여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관으로서만 자신에게 비쳐진 것들을 객체로서 받아들이는 주객관계로서 있는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그곳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빠지기'도 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며 거주하는 '세계 내 존재'라는 것이다. 그곳에 관심을 갖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는 직접적 행동으로서만 지역사회정신의학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우정동 취약계층에 대한 중독치료 지원을 위하여 주민센터를 방문하고 동장님과 협약식을 가졌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실제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공동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나 궁금하다.

'실존시간'이란 필자의 칼럼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현재가 강물처럼 이어지는 연속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근원적 시간은 우리가 얼마나 실존을 성취하느냐에 따라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을 달리 경험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열었을 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렇게 열렸을 때는 과거, 미래, 현재의 세 가지 시간적 개현이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예컨대 지금 이곳에서의 내 자신에게 울산 우정동에서의 그 당시 과거도 같이 열려서 미래의 내 존재 가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열려 그곳이 취(取)해질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예전 그 글 마지막 구절에 썼었다. "그리하여 우정동이 의미 있을 때 우리는 존재가 되고, 우리 존재가 보살핌일 때만이 또한 우정동이 의미 있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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