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공제(同舟共濟) - 정말 우리는 하나이고 싶을까
동주공제(同舟共濟) - 정말 우리는 하나이고 싶을까
  • 울산신문
  • 승인 2019.05.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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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문재인 정부가 2년을 맞았다. 집권 초반기의 변곡점을 찍고 이제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집권 청사진이 본격화되는 시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딱 2년 전 오월 아침에 취임 일성을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 따뜻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섬기겠다고 밝혔다. 

정치인의 말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문 대통령의 이 취임사는 진정성 있는 울림으로 자리했다. 취임사 직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 가까이 가는 경이로움의 연속이었고 적폐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에 한껏 기대를 걸었다. 

딱 2년이 지났다. 경이적인 지지율은 이제 먼 옛날 이야기가 됐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발표하는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이제 40%대에서 제자리걸음이고 더 이상 뉴스의 초점도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론조사, 혹은 통계가 가지는 오류다. 통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이다" 영국의 정치가 디즈레일리의 말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정부와 시민단체, 혹은 언론사에서 쏟아내는 여러 통계수치와 만난다. 통계자료가 우리의 생활과 무관한 것이라면 얼핏 보고 잊어버리게 되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오늘과 밀착된 내용이다. 정당 지지율이 그렇고 인구통계가 그렇다.  통계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은 바로 통계, 혹은 여론조사를 주도하는 쪽의 의도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황혼 이혼이 신혼 이혼보다 많다'라든가, '어느 도시의 고령화 인구가 전국 최고'라는 등의 통계가 그렇다. 

이같은 통계는 언론사가 뉴스거리로 만들기 위한 의도로 통계의 기준점을 의도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날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1898년 미국 해군 징병관들의 참전자 모집에 사용한 통계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스페인과 함께 쿠바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병사부족으로 징집이 필요했지만 지원자가 부족했다. 이때 해군은 묘안을 짜낸다. 당시 쿠바전에서 전사율은 병사 1,000명당 9명꼴이었고 뉴욕시의 사망률은 1,000명당 15명이었다. 이를 근거로 해군 징병관들은 "뉴욕시에 사는 것보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낫다"며 청년들을 전쟁터로 유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있었고 이에 현혹된 뉴욕 거주 청년들의 상당수가 전쟁터로 나갔다. 청년들로만 구성된 전사자 통계와 전 연령층으로 구성된 뉴욕시의 사망률을 같은 기준 위에 올려놓은 결과이다. 이야기가 다른쪽으로 갔지만 통계나 여론조사를 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정치에 있다. 정치는 지향점이 있고 이를 이끌어갈 방향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통계나 여론조사는 정치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기 마련이다. 비록 41%의 지지로 대권을 쥐었지만 통합과 새로움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의 출발에 대한민국은 숨을 죽였다. 지지하는 쪽은 열렬한 찬사로 지지하지 않았던 쪽은 승복하는 마음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외침에 진보건 보수건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보는 적폐청산의 깃발을 들고 올라서고 싶었던 모든 고지에 그 깃발 꽂아 휘날리고 싶었고, 보수는 탈진한 실망감을 추슬러 어쩌면 통합과 화합의 시대가 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방관자보다는 목격자로 문재인 정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2년 동안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새로운 대한민국호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그 대한민국호에 탑승할 국민을 이분법으로 갈랐다. 동승할 국민과 함께하지 못할 국민, 딱 두 종류의 국민을 나눠 탑승 티켓을 배분했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가는 알지만 실제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오늘의 수사로 바꾸면 '정치는 이미지'로 번역된다. 이미지란 내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그렇다고 이미지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는 말은 아니다. 

대통령의 취임 2주년에 그의 취임사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정치인 문재인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은 그의 이미지 보다 그의 눈빛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선한 사람 문재인, 정직한 사람 문재인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변호사 문재인과 낙선한 문재인, 정치 안하고 싶다던 문재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푸른 오월에 친구 노무현의 사망을 알리던 그의 담담한 눈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가 밝힌 새로운 대한민국, 하나의 대한민국은 기대감이 높았다. 

정치는 언제나 우리는 하나라고 외친다.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배달의 기수라는 이름으로, 반만년 역사의 정통성이라는 걸개로 언제나 우리는 하나였다. 그 하나의 저변에는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결국은 함께 잘살아 보자는 신념이 바탕이라는 믿음과 백의민족에 평화를 사랑한 민초들의 심성까지 공통의 유전인자가 흐른다는 허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하나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스스로 촛불로 탄생한 정부임을 부인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와 그 주변에서 발굴한 박근혜 정권의 오물들을 비리와 적폐의 이름으로 진열했다. 

광장은 전시장이 됐고 촛불과 한배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광장의 출입증을 받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그 나팔수는 놀랍게도 적폐 대통령이라 낙인찍은 이명박이 만든 종편이 맡았다. '말초를 자극하고 어렴풋한 것들을 무한 반복하라'는 괴벨스의 군중심리가 종편의 성장 발육제가 됐다. 우려로 출발한 대한민국 종편은 실로 엄청난 반전을 거듭했다. 존폐의 위기도 있었고 무용론도 비등했지만 지금의 위상은 완전히 반전이다. 

보도와 시사, 예능과 드라마로 무장한 종편은 이미 지상파의 견고한 아성을 무너뜨렸다. MBC는 끝없이 추락하는 뉴스 시청율에 8시 방송 시간도 포기하고 30분 진격을 외쳤고 KBS는 눈을 돌린 시청자를 잡기 위해 뉴스타깃을 아예 진보층에 두고 오늘밤 김제동이라는 변종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냈다. 이같은 변화에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과 박근혜가 방치했던 종편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뉴스는 잠시, 그러나 시사는 되도록 오래고 길게, 무한리필 가게처럼 싸지만 자극적인 맛으로 시청자를 붙잡았다. 그 저렴한 콘텐츠가 급기야 박근혜 정권을 침몰시키고 문재인 정부의 충실한 정론 나팔수가 됐다. 시대마다 정권마다 분칠을 달리하던 시사평론가들은 어제의 말을 땅에 묻은 채 오늘의 말을 위한 단어수집에 혈안이 됐다. 정치가 오락이 됐고, 시사는 랩이 됐다. 낄낄거리고 깔깔거리다가 가끔 얼굴 붉히며 그래도 우리는 하나라며 서둘러 엔딩 사인을 넣는다. 

대통령 2주년 기념 인터뷰가 방송에 나간 뒤 인터뷰를 맡은 기자가 적폐대상이 됐다. '감히 우리이니에게 망발을 하다니부터' '해직하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KBS 게시판은 물론 청와대 청원란에도 기자의 사과와 용퇴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을 종편 시사프로그램들이 아니다. 언론이 언론을 도마에 올리고 이리저리 흔들고 돌려대고 후벼판다. 한 마디 할 때마다 뒤통수 어디쯤에서 자신이 뱉은 단어 하나 꼬투리 잡힐까 싶어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종편 만난 물고기들은 우리는 하나가 아니냐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애써 실룩거리며 눈꼬리를 내린다.  바로 이 장면이 지금, 하나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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