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주말, 하늘공원으로 조문을 가는 길 대암댐 끝자락에서 만난 보리밭이 전날 내린 비바람 탓에 쑥대밭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여든 중반을 바라보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해 보리수확을 했으나 길고 긴 여름 장마로 인해 제대로 건조가 되지 않아 결국은 보리에 싹이 자라 먹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


말로 표현 못할 배고픔을 겪은 당신께서 산고의 고통을 느낀 계묘년 보리흉년 때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보리밭을 지나며 “올해는 풍년이 들어 농민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띄어야 할 텐데" 라고 지극히 공무원다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울산 한 가운데 동네인 범서 천상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울산에서 다녔습니다. 군대 생활을 제외하고는 울산을 단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뼛속까지 울산사람입니다.


학교 졸업 후 잘나가는 직장에 다니다가 “야야 밥은 내가 먹여 주마! 아들래미  면서기 소리 함 들어 보는게 소원이다" 라는 아버지 말씀 따라 직업공무원이 되어, 30년 가까이 공직자로 울산 시민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반세기 넘게 울산의 변화를 몸소 겪었습니다. 어린시절, 선바위 아래 큰거랑(태화강)에서 친구들과 볏짚을 엮어 민물고기를 잡는 배밀래기 천렵을 하여 끼니를 때울 때 쯤 울산은 공업화에 기지개를 켰습니다. 논과 밭이었던 곳에 공장의 굴뚝이 하나 둘 들어섰습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만든 공장의 굴뚝을 볼 때마다 신기했습니다. 한창 호기심 많은 어린 나이에 바라본 굴뚝은 그 자체로 신비로웠습니다.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도 마냥 신기했습니다. 공해와 오염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의 검은 연기가 오늘의 울산을 만든 동력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 알게 되었습니다.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 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전망이 눈앞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공업탑 비문에 새겨진 글처럼 말입니다. 울산은 그때 이후 논밭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든 고향을 내주었고, 바다를 매립하여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십리대숲 대나무가 파죽지세의 기세로 자라나듯 울산은 성장과 발전의 신화를 만들어왔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공장이 생기듯, 하루하루가 다르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시는 급속하게 팽창하였습니다. 토박이보다 이주민이 많은 도시가 되었고, 이주민 2세와 3세는 이제 울산이 고향이 됐습니다. 동해안 조그만 마을이었던 울산이 반백년 조금 넘는 짧은 기간에 이 같이 폭풍성장할 수 있었던 원천은 누가 뭐라 해도 기업입니다. 기업이 없었다면 울산이 세계적인 산업도시라는 이름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과 같은 울산의 위상과 명성도 없었을 것입니다.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만 명이 근무하는 공장과 기업이 있는 도시는 흔치 않습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도시가 바로 우리 울산입니다. 호황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IMF라는 최악의 불황기에서도 울산은 끄떡없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이라는 3대 핵심 산업이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울산은 불황을 모르는 도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산업수도'별칭과 함께 시민들도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주난을 걱정하기 보다는 물량을 제때 공급할 수 있을까를 먼저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울산이었지만, 최근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세계적인 불황과 맞물리면서 울산의 산업현장도 활력을 잃었습니다.  


도산과 폐업, 그리고 울산을 떠나는 기업, 시민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울산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위기와 시련의 연속이지만, 분명 울산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힘이 있습니다. 고래심줄 같은 끈끈함과 용광로처럼 하나로 화합하고 뭉치는 울산 특유의 뚝심이 있습니다. 외곽순환도로, 산재공공병원의 예비타당성 면제사업 확정, 조선수주 세계 1위 탈환 등 울산경제에 청신호가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소경제, 부유식해상풍력 등 울산의 신성장 동력 사업에 투자자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저도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불황 탈출에 혼신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최근 울산의 지역대표 글로벌 기업인 H사의 본사이전 계획으로 울산시민은 위기의식을 동반한 심리적 저항과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울산을 떠나겠다는 기업이 있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심정입니다. 떼를 쓰기보다는 이해하고 설득시키고, 고충과 애로를 해소하는데 적극 나서야 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울산의 모든 공직자들이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울산의 힘은 기업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울산과 기업은 바늘과 실 같은 존재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시민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기업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이미 충분히 증명됐습니다. 기업들도 울산을 옛날처럼 기업하기 좋은 매력적인 도시로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공직자이기 이전에 울산을 사랑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업과 울산과 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올해는 제발 보리농사를 포함하여 벼농사, 배농사, 고용 농사, 수주 농사, 수출농사도 풍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이 박장대소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