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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범어라고 알려진 산스크리트어는 고대인도 전역을 지배한 고급언어였다. 일상어라기보다는 경전이나 기록용 언어로 전승된 산스크리트어는 지금은 소수언어로 전락했지만 최근 다시 부활의 조짐도 보인다. 인도의 방송 매체에서 산스크리트어 방송이 다시 재개됐고 산스크리트어 문학 활동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인도 북부의 마디아프라데시 주에는 여전히 산스크리트어가 일상 언어로 존재한다는 보고도 있다. 

느닷없이 왜 산스크리트어를 이야기하느냐면 바로 우리말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표기문자로서의 한글과 우리의 일상 언어로서의 한국어는 산스크리트어와 친인척 관계다. 수많은 증좌가 있고 학술적 근거도 있지만 이 부분은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딱 하나 아수라 이야기만 하자. 아수라는 본래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다. 하지만 이 착한 신이 자신의 근원인 하늘과 적대적 관계를 만들면서 전사로 변신한다. 이때부터 아수라는 악의 화신이 됐다. 아수라가 하늘과 싸울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측한 인상의 악귀가 바로 아수라다. 

물론 이 단어의 기원은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비슈누신의 원반에 맞아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다시 공격을 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참담한 전쟁터나 믿기 어려운 혼란의 현장을 보고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지난 주말 현대중공업이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법인분할안을 주총에서 통과시켰다. 현역 광역단체장이 투쟁의 선봉에 서는듯 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지주사의 울산존치를 주장했던 송철호 시장의 삭발투쟁도 무위가 됐다. 정부 여당의 합병과정에 문제를 제기해야 할 입장에 있던 자유한국당 울산 의원들은 불편한 스탠스를 취하며 송 시장과 노동계에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지만 이제 그 자세 역시 엉거주춤하게 됐다. 차라리 생존의 문제를 들고나와 불법이든 뭐든 온몸으로 반발한 노조의 가열찬 투쟁은 선명해 보이기는 했다. 엉거주춤하게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외치는 정치는 지난 주말 울산에서 초라하고 저렴했다.

문제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 3시간 남짓의 울산사태에 합병을 총지휘한 산업부와 청와대는 없었다는 점이다. 막장 같은 폭력 사태가 몇 시간 동안 울산을 장악했는데도 공권력의 지휘부는 인원 통솔만 지휘할 뿐 현행범의 현장을 묵인하고 범법자를 눈빛을 슬쩍 피해버렸다. 불법 점거당한 주총장은 이미 법외 지대였고 법원의 퇴거명령이나 매회 5,000만 원 범칙금 통보문서는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구겨져 있었다. 

민노총을 중심으로 외곽지원까지 가세한 주총장은 이미 정상적인 주총을 열 상황이 못 됐고 공권력은 이곳을 보호할 의사도 없었다. 결국 성동격서로 치밀하게 준비한 사측은 정 반대 방향인 울산대 체육관으로 주총 장소를 변경했고 순식간에 모든 것은 끝났다. 

주총 며칠 전부터 한마음회관을 중심으로 전면전을 불사하겠다고 벼르던 노조는 허무하게 주총이 끝나자 일부가 현장을 덮쳐 화풀이를 했다. 불법이 자행된 시간까지 울산사태와 관련한 정부의 입장은 없었다. 치안을 책임지는 행안부와 경찰은 물론 합병의 지휘부였던 산업부, 노사문제의 실무부서인 고용노동부는 주총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현장을 외면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기업 합병 문제 등과 관련, 국제적인 통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부 입장도 밝히기 곤란하다"는 변명이라도 했지만 고용부는 아예 입을 닫았다. 입 닫은 고용부를 향한 민심의 핀잔이 빗발치자 고용부는 장관 명의로 "불법은 엄벌하겠다"며 북 대신 장구채를 잡고 부리나케 두들겼다. 하지만 정작 주말 백주대낮에 시가지 전체가 불법 전지였을 때 치안을 책임진 행안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초 현대중공업은 법원 결정을 토대로 경찰에 거듭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다. 지난달 29일 울산 동부경찰서에 퇴거조치 요청을 하는 등 3차례에 걸쳐 시설물 보호와 노조원 퇴거 요구했다. 하지만 현장에 배치된 경찰병력 4,200여 명은 대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노조원들은 지난달 27일에는 현대중공업 본관 진입을 시도하면서, 회사 경비원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현 정부의 최대 지지세력 중 하나인 민주노총에 대한 공권력의 눈치 보기가 또다시 재연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28일 밤 현대중공업 본사 밖으로 나가려던 조합원 승합차에서 20ℓ들이 시너 1통과 휘발유 1통, 쇠파이프 39개가 회사 측 보원 요원에게 발견됐다. 도주를 막는 보안 요원을 차에 매단 채 150여m를 달리기도 했다. 노조원들은 "차량 발전용 등 점거 현장에서 쓸 비품"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은 물건만 압수한 채 문제를 확대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선산업의 빅딜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느냐는 점이다. 지난 1월 현대중공업은 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에 대우조선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얼핏 보기엔 현대중공업이 인수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지만 사실은 산업부의 기획된 구조조정이다. 정부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힘을 지렛대로 위기상황의 기업군을 정리정돈하기로 기획했고 불황까지 겹친 조선산업을 타깃 1순위로 삼았다. 

하지만 정작 합병이 가시화되자 노동계와 지역의 반발이 거셌다. 합병의 역풍이 정권에 부정적인 사안으로 확대되자 지휘봉을 지고 있던 산업부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산업부의 수장인 성윤모 장관은 울산에서 엄청난 충돌이 예상된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수소충전소 착공식에서 수소경제의 성과를 홍보하는 데 열을 올렸고 다음 날에는 아예 울산사태에 대한 입장은 내지도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이쯤 되면 직무유기다. 삭발로 시민의 염원을 호소한 시장의 행동이 단체장의 위치에 걸맞은 것인가를 두고 일부에서는 왈가왈부하지만 성윤모 장관의 무책임이나 경찰 수뇌부의 수세적 태도에 비하면 오히려 분명한 의사표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현대중공업 사태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할 상황이다. 주총 승인에 따라 현대중공업은 중간지주회사와 조선·특수선·해양플랜트·엔진·기계 사업을 영위하는 자회사로 나눠진다.

현대중공업은 중간지주사의 사명을 한국조선해양으로 바꾸고 신설 자회사의 사명은 현대중공업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국조선해양이 분할 신설회사의 주식 100%를 보유하는 물적분할 방식이며, 한국조선해양은 상장법인으로 본사를 서울에 두고 신설 회사인 현대중공업은 비상장법인으로 울산에 본사를 유지하는 사업장이 된다. 하지만 거제 대우조선 실사부터 국제기구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합병을 지휘하다시피 한 정부 부처의 보신주의와 불법을 묵인하는 공권력의 방임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결국 이제는 합병의 지휘부 격인 정부가 나서야 할 차례다. 어디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이 기획됐고, 이미 이같은 혼란은 어느 정도까지 예상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합병을 주도한 당사자로서 갈라진 울산시민들의 여론과 상처를 어떻게 달랠 것인지도 분명히 하고 합병 이후의 현대중공업이 울산을 절대 떠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떤 말들이 지역을 둘로 가르고 불법과 무법천지를 만들게 됐는지도 분명히 따지고 폭력사태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확실한 매듭으로 법치의 제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과대포장과 침소봉대로 여론을 왜곡한 세력과 부화뇌동한 일부 정치인들도 무엇이 울산과 국가경제를 위한 일인지를 확실한 근거를 갖고 시민들에게 설명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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