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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나선 길이다. 길도 멀거니 와 무작정 간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곰배령이 아니기에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서둘러 왔건만 주차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대기 중이다. 

들머리 절차가 까다롭다. 정확한 시간이 되어서야 사전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신분증까지 체크한 뒤 들여보내 준다. 하산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음이 못내 부담스럽지만 어렵게 온 걸음인 만큼 기대가 남다르다. 

곰배령은 곰이 하늘을 향해 벌렁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해발 천고지가 넘는 산등성이에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이 배를 뒤집고 있을까. 기대와 설렘으로 오르지만 내려올 걱정도 적지 않다. 그나마 경사도가 완만하여 할머니들도 콩자루를 지고 넘나들었다는 말에 위안을 삼으며 걸음을 옮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다는 곰배령이다. 소문답게 초입부터 조릿대 꽃들이 정원을 이룬다. 몇 걸음 옮기자 초롱꽃이 부끄럼 많은 새색시 마냥 수줍게 눈인사를 건네 온다. 그 옆에는 천진난만한 왜미나리아재비가 방긋방긋 노란 웃음꽃을 날린다. 말로만 듣던 야생화의 모습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꽃이 아니라고 그냥 스칠 일이 아니다. 곰배령 속살을 파고들수록 유혹하는 건 나무들이다. 탐방객 대부분이 앙증맞은 꽃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맹하에 푸름을 더해가는 나무들의 매력에 걸음이 늦어진다. 녹음방초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는 천혜 자연이라는 이름값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따금 덤불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살짝 고개를 내밀다 자취를 감춘다. 

자연은 우주의 질서를 어김없이 실천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리를 내어주는 천이는 인간이 태어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어긋날 게 없다. 천수를 누리고 고사한 나무 한 그루가 밑둥만 남은 채 길옆에 주저앉아 있다. 고사한 나무가 내어준 자리에는 다른 수종들이 터를 잡고 총총히 자란다.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있는 까치박달나무가 시선을 끈다. '입이 뚜렷하여 주름이 잡히고, 벌레집 모양의 열매가 달리며, 목재는 조직이 치밀하여 탈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탈이라, 내가 알고 있는 하회탈이나 오광대 탈들이 이 나무로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반가운 척 고개를 끄덕인다. 악귀와 역병을 쫓아주는 탈에서 풍년과 안녕을 위해 춤추는 광대들까지 까치박달나무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어쩐지 인간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듯 푼더분하다. 

깊은 곳에 터 잡은 거제수나무는 껍질이 너덜너덜하다. 사람을 피해 옷을 벗으려다 오가는 행인의 눈길에 몸이 붉어졌을까. 황자작이라는 애칭이 잘 어울린다.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진 겹의 껍질을 벗겨 주면 개운하련만 왠지 원치 않을 것 같다. 거제수나무도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채취하여 위장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고맙긴 하지만 나무로 본다면 이 또한 고통이 아니겠는가. 띄엄띄엄 같은 수종들이 모여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인간을 위해 희생되지 않는 생물이 없는 듯하다.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마치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양 착각이 들 정도다. 살아내는 일이 깊고 깊은 산중이라고 다를 게 없다. 비바람에 꺾이고 쓰러지길 수없이 반복하고서야 온전하게 허리를 폈을 나무들이다.

쭉쭉 뻗은 나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진정 세상 이치가 인간 중심으로 만 돌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곰배령에서 배운다. 인간을 위한 자연보호가 아닌 자연을 위한 자연보호가 되었을 때 숲은 인간의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이다.

누가 곰배령을 천상의 화원에다 비유했던가.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펼쳐진 오만 평의 정원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서로 키재기를 하고 있다. 봄꽃은 지고 여름꽃은 때가 이른가. 띄엄띄엄 야생화가 숨어 있을 뿐 상상하며 올라왔던 화원은 아니다. 정녕 우리를 맞아준 건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산 너머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다.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에 위로받는 여리디여린 것이 인간이다. 기대한 만큼의 야생화는 없지만, 하늘 아래 일번지로 소풍 온 기분이 상쾌하다. 곰배령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점 따라 내 마음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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