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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왔다. 독립을 향한 만세와 민주화를 향한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그 6월이 역사의 시간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 1926년 4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했다. 순종의 죽음은 식민지 한국인들을 다시 결집시켰다. 전국에서 추모행사가 거행됐다. 당시 보통학교 교정은 지역 주민들과 청년·학생들이 다양한 행사를 치르는 장소였다.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서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소리 내어 곡을 하며 나라 잃은 식민지인의 현실을 서로 확인했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의 식민정치에 저항했었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산 지역민들과 학생들은 봉도식(추모식)을 열었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가게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5월 1일, 울산공립보통학교에 울산 지역 주민과 학생 2,000여 명이 모여 봉도식을 치렀다. 울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봉도식을 마친 뒤 학교 측에 하루 동안 휴학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주일간 동맹휴학할 것을 결의했다. 학성공립보통학교(병영초등학교)과 동면공립보통학교(남목초등학교)에서도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추모식을 열었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의 역사 기억을 가진 청년들과 학생들은 전국적 추모 열기를 확인하고,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다. 민족의 자유 쟁취와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이 비밀스럽게 제작됐고, 순종의 장례날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울산지역의 언론사들은 일제 경찰의 방해를 무릅쓰고 장례식 참배단을 모집하여 상경했다.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울산공립보통학교(울산초등학교), 학성공립보통학교(병영초등학교), 북구 강동 정자강습소, 온양공립보통학교(온양초등학교) 등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울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추모식 뒤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동맹휴학은 일제에 대한 학생들의 가장 적극적인 저항운동이었고, 또 하나의 6·10만세운동이었다. 울산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개교한 울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일제강점기 때 근대 교육을 위한 공간이자 식민지 청년들의 의식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장소였다. 울산 읍내 한 가운데 위치하여 유학생 귀국강연회, 농산물박람회, 순회 연극공연, 면민체육대회 등 대중 강연이나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이들 행사는 3·1운동 이후 조직되어 민족계몽과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활동한 청년단체와 소년단체 등이 주도했다. 1920년대 의식적인 식민지 청년과 소년들의 활동이 1926년 6월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926년 6월 저항의 역사는 1987년 6월에 재현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과 독립 요구가 강압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2019년 6월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새로운 기록을 만들고 있다.


울산광역시 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세 번째 이야기를 써 가고 있다. 3·1운동의 장소가 되었던 병영초등학교의 역사를 기념하는 사업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교육자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사업에 이어, 옛 울산초등학교 교문이 있었던 자리에 기념 표지판을 세우고, 홈페이지 운영을 통해 울산의 6·10만세운동 역사를 소개한다. 조선시대에 객사가 있었고,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 울산초등학교 자리를 역사의 장소로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날 6·10민주항쟁 32주년 울산기념사업위원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항쟁의 핵심 장소였던 중앙동 뉴코아 아울렛 앞 인도에 표지 동판을 설치한다. 2019년 6월 10일, 우리는 역사의 장소이자 기억의 장소로 거듭나는 곳에 다시 선다. 그 때 1926년과 1987년 6월, 거리에 나섰던 이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듣게 될지 모른다. “그대,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미래를 제대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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