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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새벽을 뜨겁게 달군 20세 이하(U-20) 월드컵축구가 끝났다. 아쉽게 역전패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한국 남자 선수가 처음으로 골든볼을 들어올리는 영광도 누렸다.

이번 결승전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한국 남자 축구 역사상 최초로 FIFA 주관 대회 첫결승이었고 이강인의 선제골은 대한민국을 한순간 하나로 만들었다. 어린 선수들의 이번 성과는 두고두고 한국축구의 역사에 남을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번 축구대회는 묘하게 울산과 연결돼 있다. 결승이 열린 곳은 폴란드 우치다. 결승 상대는 우크라이나다. 축구대회가 열린 폴란드와 그 곳에서 연일 활약한 최준 선수 등 울산의 아들들은 묘하게 연결돼 있다. 결승에서 마주한 우크라이나 역시 예사로운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스크바 국립박물관을 가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이곳에는 슬라브 민족의 자긍심으로 전시된 철제 칼이 있다. 놀랍게도 이 칼은 철기문화의 상징으로 철기문화의 이동경로를 품은 보물이다. 이 칼은 백제의 칠지도를 뿌리로 하는 철제 보검으로 남으로 왜와 북으로 바이칼, 서쪽으로 투르크까지 이어지는 강철대국의 뿌리다. 이번 결승 상대였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뿌리를 둔 슬라브 민족이다. 이들은 투르크라는 이름의 강건한 민족으로 우리가 아는 돌궐과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헝가리는 흔히 흉노라 불렀던 훈(Hun)족의 나라로 이들을 인류사에서는 서쪽의 훈족이라고 한다. 훈족과 투르크족의 뿌리는 여전히 연구중이지만 게르만과 다른 경로로 이동한 점을 보면 슬라브계의 형성에 어느정도 영향을 줬다는 설이 가능하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은 서방의 흉노(匈奴)족과 동쪽의 흉노는 한 집안으로 본다. 

우랄알타이에 근거를 둔 흉노가 농경과 유목생활을 병행하다 흑해를 지나 헝가리를 통과하여 서유럽까지 이주했던 것이 서방인류 이동의 한 줄기다. 이들은 동쪽에서 왔고 유독 말타기에 능하고 활쏘기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바로 동이족 이야기와 유사하다. 대회가 열린 폴란드나 결승 상대였던 우크라이나 모두 슬라브족의 영향에 있는 국가들이다. 그 대표주자가 러시아고 그 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동쪽 끝, 철기문화의 한자락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들 국가에게 동방은 자신들의 뿌리이기도 했지만 공포의 대상으로 치욕의 상처가 새겨진 곳이기도 했다. 바로 몽골 때문이다. 3세기 전반에 몽골군의 침략은 중앙 유럽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폴란드와 슬라브 지역의 유린은 무려 400년 동안 공포로 이어졌다. 

이번 월드컵 축구대회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지만 지울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인류사의 뿌리였다. 이번 월드컵을 빛낸 태극전사 중에 유독 눈에 띠는 선수는 이강인과 이광연, 그라고 장신의 오세훈, 날렵한 조영욱과 최준이 있다. 남아공과의 경기에서 첫 골을 넣은 김현우도 수훈 선수다. 무엇보다 정정용 감독의 리더십과 근성은 태극전사를 하나로 만든 조직력의 파워를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모두가 북방계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육촌 보족의 중심에 이씨가 있고 왕가의 기반을 정비하고 공고히 한 김씨는 금씨로 불렀던 막강한 철기부족이었다. 오씨 성이나 조씨 성 역시 북방계의 피를 가진 종족이고 최씨는 신라 사회의 주류였다. 

많은 학자들이 인류사적인 궤적을 쫓아 연구한 결과 우리나라의 대표 성씨인 김씨와 이씨는 모두가 북방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을 내리고 있다. 그 북방계의 막연한 꼭짓점을 두고 여전히 많은 가설과 추론, 역사 유물론적 증명이 뒤따르고 있지만 아직은 확증할 방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북방계 민족인 흉노족이 알타이 부근에서 동서로 나뉘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동쪽 끝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의 성과로 알타이 산맥부터 몽골 초원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유사한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확인된 바 있다. 바로 이들의 한 줄기가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했고 대륙을 달리던 그들의 기마문화가 한반도의 끝에서 다시 대륙으로 향하는 웅혼한 기상을 떨쳤다는 이야기다.

수문장 이광연과 골든볼의 주인공 이강인은 북방계의 대표적인 청년들이다. 북방계는 눈이 작고 둥근 두상을 가진 특성이 있다. 북방계는 알타이에서 출발한 흉노족이 그 출발이고 흉노의 세력은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대륙을 평정했다. 지금도 중부유럽에서는 훈족의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울음을 그쳤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우리 태극전사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축구강국들에게 기죽지 않는 이유도 유전인자 속에 녹아 있는 우월성의 잠재적 영향이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북방계의 대표적인 특징인 좌우로 가늘고 긴 모양의 눈은 혹독한 추위의 보호 장치로 운동선수들의 눈에 많이 나타난다. 대한민국 대표 축구선수 손흥민과 박지성의 눈을 생각해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대목이다. 

북방계에서 국가를 이룬 고조선과 고구려는 흉노족과 혈통적으로 가까웠다. 같은 유목민출신의 국가였다. 그 일족이 남하해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에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나와 있다. 결론적으로 삼국과 흉노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였고 흉노의 기마세력이 정착한 해양문화권의 남방계와 결합해 탄생한 국가가 한반도 고대국가의 원형이라는 가설도 있다. 김해김씨 역시 흉노의 후예인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박혁거세나 김수로가 모두 알에서 탄생한 난생설화를 바탕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 공통점이 있다. 난생설화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북방계 설화가 뿌리고 이들이 남방계의 여성과 혼인을 통해 문화 인류사적 변화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장황한 인류사를 이야기 한 것은 바로 이들 문화 유전인자와 울산과의 관계 때문이다. 최근 울산시가 반구대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시민단 구성에 나선다는 소식이 들린다. 바로 이 시민단에게 처음 주지시켜야 할 대목이 바로 반구대암각화와 인류사의 관계다. 울산이 반구대암각화에 목을 매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뿌리다. 반구대암각화는 무엇보다 우리의 뿌리를 웅변하는 증거물이다. 실증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변변한 고대역사서 부재를 거론하며 이 땅의 역사를 단군조선 이후로 축소한 일본 왕실의 어용학자들이 죽어도 부정할 수 없는 생생한 민족의 이동경로가 반구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지난 1948년 러시아 이르쿠츠크시 남쪽의 앙가라강에 댐이 건설됐다. 이 댐으로 수몰된 지역에서 발견된 암각화가 시스키스키 암각화이고 일부가 남아 있다. 사슴과 사냥술을 묘사한 이 암각화는 반구대암각화의 원형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지난 2008년 내몽골 적봉에서 한국형 암각화가 발견됐다. 고려대 한국고대사 연구팀이 발견한 이 암각화는 바이칼에서 시작된 암각화의 흔적이 한반도 동쪽 끝 울산으로 연결되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내몽골 암각화는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방패형 검파형 암각화의 기원을 찾는 중요한 증거물이 됐다. 특히 내몽골 지가영자 유적의 남쪽 사면 바위 군락의 상단부에서는 울산 천전리암각화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은 마름모모양, 동심원모양, 사람얼굴모양 등의 암각화가 나와 학자들의 가슴을 달구기도 했다. 바이칼과 내몽골, 요하문명지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고대인류의 이동이 바위그림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북방계 인류와 남방계의 인류가 융합의 과정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 그들이 한반도 문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사실은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수렵과 어로의 증좌가 잘 말해 준다. 불식여산진면목 지연신재차산중(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고 소동파가 읊은 것은 산속에 있기에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경구(警句)다. 울산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인류사 전체를 보지 못한채 암각화군이라는 이상한 콘텐츠로 세계유산 등재를 밀어붙이지 못하는 것은 인류문화사에 대한 직무유기다. 인류사 전체를 대표하는 보물을 제대로 보고 그 가치를 구현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울산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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