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달팽이와 나

제인자

텃밭 상추잎에 따라온 달팽이
수돗물 세례 받고 빗장을 지르면
안으로 걸어 닫은 캄캄한 한 채의 집이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되레 놀란 나는
푸른 잎 쌈 싸 먹고 푸른 똥 누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성귀 식탁이 나를 부르는 사이
그는 안테나 내밀어 적진을 탐지하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에게
쑥갓깻잎오이가지가 어찌하여
뼈가 되고 힘줄이 되는지요
쌀보리콩수수가 어찌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눈물의 기도가 되는지요

한 채의 집을 들어 올려 텃밭으로 가는 나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른 잎 갉아먹고 더디 깨닫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는

△제인자: 경남마산 진동출신. 2005년 문예운동 등단, 제5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2019년 기독신춘문예 수상. 시집 '달의 눈썹'. 울산기독문인협회장.
 

한영채 시인
한영채 시인

원동에서 푸르고 실한 매실이 왔다. 효소 담을 매실은 알이 굵고 튼튼하다. 매화가 폈다고 봄소식이 온지 어저께 같은데, 그 사이 비와 햇살과 바람은 분주했나보다. 매화나무는 알을 부풀려 여름 생과일주스처럼 왔다.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유월이다.


짙어가는 녹음들, 몸 부풀리고 있는 어린 채소들…. 부지런히 여린 봄을 점령했다. 어제는 채전 밭에서 웃자란 상추와 아욱, 쑥갓이 많다며 가까이 사는 언니가 좀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요즘 식탁엔 자주 채식주의자가 좋아할 재료가 차려진다. 나무와 채소엔 벌레들이 생겨나 생식을 즐기는 어린 것들의 잔치가 이어진다. 여름이 시작이다. 시인은 가까운 텃밭에 심은 푸성귀에서 우주를 본다. 푸성귀에 따라온 아기 달팽이가 넓은 상추 잎 뒤에 붙어 있다. 시인은 게으르게 무농약을 즐긴다. 무른 상추 쑥갓과 아욱, 오이와 달팽이, 채소 이파리 뒤에서 달팽이가 쉬고 있었을 것이다. 두꺼운 껍질을 매고 몸 숨기고 있을 때 시인의 발자국에 안으로 목을 당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우주를 들어 올리는 달팽이의 하루가 밀도 있게 그려져 있다. 시인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한다.


설탕과 매실 알을 일대 일로 독에다 넣는다. 뚜껑을 덮어 삼 개월은 잊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숙성이 돼야 새콤달콤 좋은 맛을 낸다. 시도 그러하다. 낮은 곳에서 번개 치듯, 우레가 오듯, 무방비 상태로 어느 날 갑자기 온다. 전율처럼 경험을 통해서 온다. 삭이고 묵혀 다시 물상화 되는 순간 성스러운 기도의 시간이 오고, 시의 집이 생긴다. 그러니까 알이 단단해진다.
 한영채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