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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편백나무 숲길을 걸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편백나무가 빽빽하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피톤치드가 코끝을 스치고 시야를 환하게 한다. 울산에 이런 치유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숲길 따라 걷다 보면 관문성 한자락과 철기문화의 흔적들이 이어지는 새로운 과거와 만난다. 그 길의 끝에 망루가 있고, 하늘과 닿는 곳에 울산의 또 다른 이야기가 전광판처럼 펼쳐진다. 놀라운 장면이다.  

얼마 전 울산 북구에서는 두 가지 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북구를 찾아 달천철장을 살펴본 것이고 나머지는 북구청장이 일본의 시마네현을 찾아 철기문화의 원형 찾기에 나섰다는 이야기다. 이 두 가지 뉴스를 접하면서 오래전, 필자가 석탈해를 소환해 '아이언로드'를 긁적였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 울산 북쪽, 경주와 맞닿은 일대는 고대 한반도의 야철장이자 철기문화의 심장이었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했다. 울산이 공업입국과 조국근대화의 선봉장이 된 셈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울산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는 롤모델이 됐다. 우연이 아니다. 울산은 한반도 철기문화의 심장이다. 그 증좌가 달천철장이고 불매질로 노동요로 이어진 유전인자가 울산의 땅과 사람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몇 해 전 석탈해로 시작된 울산의 철기문화를 이야기하며 아이언로드의 복원을 주장하면서 달천철장 일대는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는듯했다. 제철역사관과 체험관, 전시관, 쇠부리축제장 등이 만들어지고 시베리아와 일본을 이어주는 아이언로드를 만나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지한 문화재청과 복지부동의 행정은 시늉만 하고 페인트칠만 두루뭉술하게 발라버렸다. 울산의 달천철장은 그렇게 함부로 분칠할 장소가 아니다. 한반도 철기문화의 원형이자 해양문화와 대륙문화가 철기로 융합된 인류문화의 보물창고다.

철장은 철의 원료인 토철이나 철광석을 캐던 곳을 말한다. 울산의 달천철장은 그 기원이 무려 기원전 2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문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의 기록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중국 한나라 이후 중국대륙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울산 달천 철장의 야철장 등 유적 발굴 이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놀라운 철기유적이 고스란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달천철장과 울산공업센터는 2,0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 그 살아 있는 증좌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한반도 동남쪽 작은 어촌마을인 울산은 철을 발견한 부족과 그 문화를 전수받은 부족들이 들어와 새로운 철의 왕국을 만들었다. 6개의 작은 족장들로 구성된 사로국이 신라라는 이름의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이들이 결국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 세력의 중심에 선 것도 따지고 보면 달천철장이 중심이다. 궁금한 것은 달천철장을 발견한 세력과 그들의 뿌리는 어디인가에 있지만 여전히 이와 관련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 등 현존하는 기록에 근거하면 달천철장의 뿌리는 신라를 이끈 석탈해계로부터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석탈해다. 탈해왕으로 불리는 석탈해는 반구대암각화에서 시작되는 인류의 이동경로와 해양문화와 대륙문화의 연결고리를 확인해 주는 놀라운 증좌다. 기록을 보자. 석탈해는 단야족(鍛冶族)이라고 했는데 단야족은 야철세력을 의미한다. 석탈해는 철기술을 바탕으로 서라벌에 입성해 왕이 됐는데 그 철은 바로 이 울산의 달천철장(達川鐵場)의 철이다. 이는 최근 달천철장 일원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단야족의 유구로도 확인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석탈해가 신라 귀족세력의 중심에 들어와 자신이 신라 땅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놓고 자신의 연고권을 주장했다고 적고 있다. 숫돌과 숯은 야철문화의 상징이다. 석탈해의 등장과 초기 신라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신라가 6촌장의 연합체로 시작해 고대국가의 면모를 만들 수 있었던 바탕이 석탈해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달했을까. 이 문제는 아직 명확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고대사의 대부분이 명확한 사실의 기록보다는 모호한 신화나 설화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기에 이를 풀이하는 학자들의 그들 나름의 잣대로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다양한 학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중 유력한 설이 석탈해의 북방유입설이다. 흉노의 후예인 석탈해가 왕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알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상자에 실린 채 한반도 동남부에 표착했다는 설화가 그 근거다. 난생설화는 대부분 북방민족을 이끈 영웅들의 출생담이다. 북방민족에 난생설화가 많은 것은 그들이 태양의 후예, 하늘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북방민족 대부분은 태양을 신표로 하고 태양 가까이 있는 새를 신물로 여겼다. 

고구려의 삼족오나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의 새문양도 여기서 비롯된다. 결국 석탈해도 북방민족의 후예로 신라 땅에 들어와 그들이 사용했던 철기문화를 활용할 수 있는 울산 달천을 그 근거지로 삼은 셈이다. 놀라운 것은 석탈해식 난생설화는 시베리아 동단, 캄차카반도부터 유라시아 중심, 알타이를 거쳐 훈족의 말발굽이 닿던 동유럽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초기 신라 왕국의 지배계층이 광활한 대륙의 후예들로 그들의 철 제련술과 철제 무기가 왕국의 튼튼한 뒷배가 됐다. 

그 증좌는 셀 수없이 많다. 고고학과 인류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시베리아 동북쪽 해안에서 한반도 해안에 이르는 해안길은 무수한 문화적 증거를 남기고 있다. 암각화는 대표적인 그들의 표식이다. 해안을 중심으로 이동했던 무리들은 북쪽의 연해주와 캄차카, 그리고 알래스카를 넘어 북미대륙으로 진출했다는 설은 이미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 문화 유전인자의 족적이 암각화와 청동기, 철제 도구들로 오늘의 인류에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유라시아대륙 동북쪽의 해양은 인류에게 이동의 활발한 근거지였다. 이 해양에서 해류를 따라 더 나은 삶을 위한 공간을 찾아 이동이 이뤄졌고 이동의 순간마다 그들의 문화는 새로운 인류에게 전파됐다. 일본열도보다 훨씬 북쪽에 사는 사람들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문화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보면, 석탈해가 캄차카반도나 연해주 방면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유목민들이 서북쪽의 몽골초원을 거쳐 한반도나 만주에 정착해 한민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허황옥을 비롯한 일단의 해양세력과 수로왕과 박혁거세, 석탈해로 대별되는 대륙 및 해양세력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에 삶의 근거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대사의 실증적 사실이다. 이같은 이야기는 한반도 동남부, 울산이 고대 한반도 문화의 융합발전소였고 해양과 대륙을 뒤섞어 새로운 문화를 만든 용광로였다는 반증이다.

우리의 경우 고대사 부분에서 많은 사료들이 유실됐고 현존하는 사료들이 극히 부족한 탓에 석탈해와 울산, 그리고 인류의 이동경로와 아이언로드 같은 이야기를 무슨 미스테리식 고대사로 치부해 버리고 있다. 이는 철기문화의 뿌리가 석탈해이고, 그 바탕 위에 신라가 다문화 다민족의 글로벌 왕국이 됐다는 인식의 전환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도시계획 전문가 이케다 사다오에 의한 울산 공업센터 구상이 울산의 오늘을 있게 한 근본이 아니라 석탈해로 시작되는 북방의 철기 문화가 바로 울산에서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반구대암각화와 달천철장을 연결하는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울산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다. 이 일은 바로 지금 울산에 사는 우리의 과제라는 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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