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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울산박물관에서 대곡천암각화 세계유산등재 학술자문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지켜본 기자들은 이날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전했다. 이른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실질적인 작업이다. 세계유산 등재의 핵심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있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유네스코가 운영지침을 통해 정해 놓은 핵심요건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모두 세 가지다.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여야 한다'는 요건과 '하나(혹은 여러) 문화 혹은 특히 되돌릴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진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대표하는 인간의 전통적 정주지, 토지이용 또는 바다 이용의 탁월한 사례여야 한다'는 요건이다. 마지막 세 번째 요건은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이 있는 사건이나 살아 있는 전통, 사상이나 신앙, 예술, 그리고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유형적으로 연관돼야 한다'는 요건이다. 

문제는 학술팀이 근거로 제시한 내용이다. 대곡천 암각화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장면을 담고 있는 암각화라는 점과 선사시대 해양어로 문화를 수준 높은 표현력으로 반영한 걸작품이라는 점, 대형 고래의 분기장면과 대형 고래의 도약(브리칭) 모습, 어미와 새끼 고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실이 등재 조건의 근거였다. 그러면서 울산박물관 측은 "대곡천 암각화는 배, 작살, 부구, 그물을 이용해 대형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장면을 담고 있고 22종에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동물그림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선사시대 독특한 해양어로 문화권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고, 고래종을 파악할 수 있는 정교한 표현력은 곧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를 주도한 학술팀은 지난 3월 구성됐다. 울산박물관 세계유산등재 학술팀이다. 이들은 '대곡천암각화 우선등재신청서 및 세계유산 등재신청서(초안) 작성'을 위해 '대곡천암각화 세계유산등재 기반마련 학술연구 용역'을 추진 중이다. 올해 말까지 문화재청에 우선등재신청서 제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학술팀이 주장하는 세계유산 등재의 조건과 근거를 통해 심각한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세계유산 등재의 대상이다. 조건과 근거의 대부분을 반구대암각화에서 찾고 있으면서도 등재 대상은 대곡천암각화군이라고 두리뭉술하게 포장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민선 7기 지방정부가 들어선 이후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해 사연댐을 부숴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툭툭 터져 나왔다. 송철호 시장은 막무가내식 파괴론에 선을 긋고 합리적 대안으로 진행 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자문단 등에서는 여전히 망치를 들 기세다. 울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시정 자문위원회가 발제를 하고 나서 이 논의는 더 목소리가 커졌다.

울산시의회에서는 '대곡천 암각화군 세계유산 등재 시민 심포지엄'이라는 행사를 열어 사연댐 부수기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사연댐 철거론의 가장 큰 명분은 담수기능 상실이다. 하지만 사연댐 관리·운영 주체인 한국수자원공사 측은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연댐의 경우 하루 18만t을 취수해 울산 중구와 북구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천상정수장으로 보내고 있다. 이 물 가운데 9만 2,000톤 정도는 사연댐의 물이고, 나머지는 상류의 대곡댐에서 유입된 물이라는 게 한국수자원공사 울산권지사의 설명이다.

만약 대체수원 확보 대책 없이 사연댐을 철거할 경우, 하루 10만t 정도의 원수 공백이 생긴다. 물론 대책은 있다. 낙동강 물을 사다 먹으면 된다. 하지만 낙동강 물은 툭하면 녹조에 오염에 논란이 되풀이되는 불안한 식수원이다. 그래도 참을 수 있다는 시민들의 합의가 이뤄지고 정부가 물값을 대면 적어도 물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수문설치든 운문댐 물 끌어오기든 물문제와 관련한 반구대암각화 보존안은 10여 년 전부터 수차례 반복됐던 주장이다. 앞뒤 살피지 않고 뭐가 우선순위인지도 모르는 문화재청은 반구대 암각화 보존 방안으로 '사연댐 수문 설치'를 권고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울산시는 반대했다. 무엇보다 문화재청이 주장하는 수문설치안은 용역결과 공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사연댐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울산공업센터 설치 이후 울산의 근대화를 이끈 심장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를 공업용수와 시민들의 식수공급으로 그 역할을 다해온 근대유산이다. 반구대암각화가 중요한 만큼 대한민국 근대화의 증거물인 사연댐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핵심은 반구대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일이다. 대곡천암각화군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이 사업의 전제조건은 원형보존이다. 문화재청의 용어를 동원하면 형상변경 없는 보존이다. 여기서 반구대암각화의 세계유산 추진을 담당하는 주체들의 자가당착이 발견된다. 바로 대상의 문제와 형상변경이라는 자기모순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반구대암각화 세계유산 등재 작업은 첫 단추가 잘못됐다. 최초 발견자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 그룹은 자신들이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는 자긍심을 담보로 너무 과한 권리를 주장했다. 대곡천암각화군이라는 이름의 청구서였다. 반구대암각화 하나로 보편적이고 탁월하고 독보적인 문화유산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도 암각화군이라는 지분으로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아우르는 세계 유일의 자연과 문화가 한곳에 집약되는 세계유산 등록증을 요구했다. 첫발을 잘못 디딘 바람에 암각화군과 천전리 계곡, 대곡리 일대의 원형보존이라는 억지스러운 논리적 함정에 빠졌다. 이는 결국 세계 유일의 선사문화 백과사전인 반구대암각화가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길을 막아버렸다.

지금 반구대암각화 보존 문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반구대암각화 앞으로 흐르는 대곡천과 함께 주변 지형의 변화를 동반하는 문화재 형상변경 문제다. 지난 1971년 겨울 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됐을 때 이 일대는 이미 울산공업센터의 용수공급을 위한 사연댐 축조가 끝난 상태였다. 7,000년의 원형을 간직했던 대곡천이 사연댐의 축조로 지리적 자연적 생태적 변화를 겪고 난 이후였다. 대곡천의 유속이 달라졌고 암각화 주변의 풍광도 변했다. 난개발도 이어졌고 지금은 박물관과 생태교실, 어처구니없는 퓨전한옥 민박촌까지 들어서 원형보존은 물 건너 간 상황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시베리아와 바이칼,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수많은 암각화가 발견됐다. 이 가운데 유라시아 최동단의 추코트카 반도의 페그티멜 암각화는 반구대암각화와 비슷한 시기에 학계에 보고된 고래그림의 암각화다. 이 지역은 베링해를 사이에 두고 알래스카와 마주 보고 있는 북극권의 툰드라 지역이다. 암각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잡이 모습과 러시아 추코트카, 그린란드의 에스키모, 미국 알래스카와 북부 대륙 연안 인디언의 포경은 극동을 중심으로 한 포경문화의 한 그룹으로 인류사를 새로 써야 할 의제가 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모두의 중심은 반구대암각화다.

또 있다. 연해주의 사카치아랸, 알타이의 칼박타시, 시스킨스키, 중앙아시아의 광범위한 암각화와 내몽골의 한국계암각화 모두는 반구대암각화의 육상동물 문양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해상과 육상의 인류사를 함께 압축한 반구대암각화는 탁월하고 독보적이며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사의 마이크로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가 그 가치를 그저 패키지 상품으로 만들어 원형보존이라는 이상한 자기모순에 가두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를 우선순위에 놓고 정부와 울산시, 문화계와 시민들이 하나가 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일도 아니다. 그 첫 단추를 꿰고 천전리와 경주 석장리, 나아가 국내 17종의 암각화를 문화유산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서다. 제발 이제는 자기모순에서 빠져나와 반구대암각화를 제대로 바라보길 간곡히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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