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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지방정원이 국가정원으로 거듭났다. 지난 주말, 국가정원으로 이름이 바뀐 태화강을 따라 대곡박물관부터 삼산까지 차와 도보로 여유 있게 둘러봤다. 대곡박물관에서 지난 6월부터 시작된 '태화강 100리 길' 기획전시는 태화강국가정원 지정으로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보슬비가 포슬포슬 내려앉는 아침, 청주에서, 진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박물관의 인적 자산인 신형석 관장의 콘텐츠가 태화강과 이 땅의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물관을 돌아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은 그날 따라 참 신비로운 기운이 흘렀다. 그 신비로움의 시작이 바로 대곡천이다. 태화강의 시작점인 셈이다. 바로 이 곳은 신라인의 유토피아였다. 천전리와 반구대, 두 암각화가 자리한 대곡천은 그 경치가 수려하고 골짜기마다 웅혼한 기상이 서려 흔히 백련구곡이라 불린다. 계곡의 정점에 천전리각석이 있다. 화랑의 정신세계가 산하에 서려 오묘한 기운을 뻗친 곳이 대곡천의 출발점이라면 그 상류에 발복의 문양으로 축원하던 제단이 천전리각석이고 그 물길 헤쳐 사연댐과 만나는 지점이 반구대암각화다. 수천년 전 이 곳에 터 잡은 이들은 햇살 거두는 시간, 스크린 벽면처럼 빛이 응집된 바위벽에 무수한 고래를 새겼다. 그 고래가 태화강을 가로질러 동해로 이어지는 꿈을 매일 밤마다 꾸었고 그 꿈의 마지막은 거대하고 압도적인 귀신고래 한 마리 끌고 올라와 대곡천 너럭바위 한켠에 풀어 헤치는 일이었음직하다. 그 신성한 기운이 흐르고 메아리치는 곳이 태화강 상류 대곡천이다. 그래서 대곡천을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문화답사 일번지로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찬찬히 가만가만 숨을 고르고 울산의 시작, 태화강의 첫물길을 더듬어 보면 대곡천이 왜 한국문화의 기원인지 알 수 있다. 대곡천은 바로 우리 문화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품고 있는 곳이다. 그 물길 따라 걷다보면 고래를 만난다. 대곡천이 흐르는 굽이를 돌아 휘감기듯 빽빽한 직립암석의 위용이 압권이다. 풍경이 시야를 가리면 푸름을 모아 정자에 올려놓았다는 집청전(集淸殿)이 기다린다. 경주최씨 가문의 문중 정각인 이곳은 고래를 만나기전 한번은 배낭을 풀고 걸터앉아 볼만한 곳이다. 시선을 정면으로 세우면 맞은 편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마리의 학과 학소대(鶴巢臺)라는 글자와 만난다. 놀랍다. 두 마리의 학은 양각으로 학소대는 음각으로 차분하다. 오른편의 학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왼편의 학은 한 다리로 서서 부리로 깃을 고르는 듯한 자세다. 태화강 하늘에 학이 날아야 하는 필연적인 연결고리다. 반구서원의 흙담을 돌아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면 비로소 바다냄새가 난다. 반구대암각화다. 세상사람들의 아집과 불통으로 부서지고 짖물려 망신창이가 된 고래떼가 세월과 세파의 소란스러움에 형체를 잃어가는 현장이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그 수면 아래 새끼 밴 범고래가 뿜어내는 움~우우~ 하는 신음소리가 들릴 것 같기도 한 현장이다.


하류로 방향을 틀면 국가정원과 만난다. 이수삼산, 태홧강이다. 오래전부터 울산사람들은 이강을 거칠게 불렀다. 전국 여러곳에 이수삼산의 흔적이 있지만 울산의 기록에는 절경과 역사가 있다. 울산의 이수는 태화강과 화진도를 말한다. 생소한 화진도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남긴 퇴적물이 변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니 바로 동천강이다. 그 두 물줄기가 하나가 되는 자리에 솟은 삼산은 태화강 밑자락의 세봉우리다. 지질학적으로 울산은 지형의 변화가 무쌍했다. 500년전만해도 지금 삼산들은 대부분 바다였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흘러 산에서 내려오는 토사가 점점 쌓여 육지로 변했다. 무도한 왜장이 병영성 돌을 뽑아 왜성을 쌓은 학성공원도 동해로 고개를 내민 작은 반도였다. 반구동과 내황동은 천혜의 항구였고 신라 1,000년의 영욕을 함께한 국제무역항이었다.


태화강의 시작은 백운산 탑골샘이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자리한 백운산 탑골샘은 위로는 형산강 아래로는 태화강, 옆으로는 낙동강의 물길을 풀어놓는 용천수다. 바로 그곳에서 발원한 태화강 물길은 두동면 천전리, 언양읍 대곡리, 범서읍 사연리까지 휘어지고 굽이치면서 태화강에 다다른다. 바로 그 상류의 정점에 이 강의 역사가 있다. 대곡리와 천전리각석이다. 천전리각석 상부에는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그려져 있다. 하부는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귀족행렬, 기마행렬도, 바다를 건너는 배, 동물 등 다양한 표현물로 구성돼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배다. 배 그림은 오래전 신라에서 벌어진 해상 교역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이 각석은 불행하게도 거의 사멸되기 직전이다.


여기에 숨은 그림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이곳에서 신라 6부족의 하나인 사탁부가 세력을 키워갔다는 사실이다. 사탁부 출신 법흥왕의 기록이 바로 그 증좌다. 법흥왕의 부친인 갈문왕과 사촌누나가 놀러와 새긴 명문과 갈문왕 일행이 법흥왕 26년 여름날 다시와 기록한 추명이 뚜렷하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돼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진한 6부(辰韓六部) 또는 사로 6촌이라 부르는 신라의 출발에서 사탁부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 훗날 사량부(沙梁部)로 경주 내남과 울주군 두서, 두동이 기반이다. 사탁부는 지증왕 이후 왕위에 오른다. 지증왕, 사부지갈문왕, 법흥왕, 진흥왕 등은 사탁부 출신이다. 이들의 남성유전자에는 C-M217 형이라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유전자는 바이칼호 주위에 가장 많고 북미에도 나타난다. 북방계의 거점이었다는 의미다. 그 세력이 부산 동삼동과 울산 황성동, 그리고 반구대암각화를 새긴 남방계와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곳이 지금의 태화강국가정원 인근 굴화아촌이다. 태화강 하류의 굴화는 조선조까지 역참이 존재했고 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경주, 동래, 언양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통신 시설이었다.


태화강이 국가정원으로 거듭난 것은 울산의 역사에서 다시 없는 기회다. 울산은 7,000년전 북방계 스키타이와 남방계 폴로네시안이 만난 자리다. 그 자리 위에서 신라 1,000년의 영광을 함께했고 대한민국 산업화 반세기를 주도했다. 이제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 차례다. 바로 그 중심이 태화강이다. 사무치는 이 강에는 놀랍게도 선사시대부터 오늘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 산업수도와 공업도시라는 틀에 갇힌 울산은 고착화된 탈바가지를 벗고 태화강국가정원의 이름으로 새로운 옷을 입을 때가 왔다. 죽음의 강이라던 태화강을 구석구석 씻어내고 대곡천부터 울산항까지 100리길을 가꾼 자신감이 오늘을 있게 했다. 강이 정화되고 생태환경이 살아나자 그 길 위에 역사와 문화가 찾아들었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울산처럼 풍부하고 특별한 문화적 자산을 가진 도시는 드물다. 바로 그 중심에 태화강이 흐르고 그 강심으로 고래가 면면히 자리하고 있다. 고래는 원시의 울산 땅에 사람이 산 증좌이자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다. 고래로 시작된 울산의 역사와 문화는 무수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 출발은 바로 반구대암각화다. 반구대 바위에서 7,000년 단잠에 빠진 고래떼를 불러내 강물에 띄워 국가정원을 한바퀴 돌아 동해로 달려가게 하는 시간이 이제 꿈이 아닌 현실이 됐다. 바로 그 작업을 해야 한다. 태화강국가정원은 세계의 어떤 강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집중하고 서둘러야 한다. 이수삼산이 하나됐듯 이제 여러가지 떠도는 것을 융합해 국가정원이라는 공간에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이야기와 공간이 상상력과 만나는 현장은 6차산업의 시대다. 그 출발이 바로 태화강국가정원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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