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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백범회관에서 열렸던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 청산을 다짐했다. 

100년 전 이 땅을 유린한 제국주의 하수인들의 총칼은 수많은 조선의 민초를 살육했다. 일왕과 사무라이 무리들이 한패가 되어 시뻘겋게 물든 눈초리로 조선인을 유린할 때, 길잡이와 앞잡이로 완장을 찾던 조선인들. 그들을 부추겨 정적을 제거하고 일제에 아첨했던 관료와 아전잔당들. 우리는 이들을 친일의 뿌리로 배웠다. 그 친일이라는 박제된 단어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분법의 사회에서 단어의 선택은 곤혹스럽다.

자칫하면 친일의 딱지가 붙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될 터이니 한 음절 단어도 몇 번을 생각해야 할 처지다.일제의 뿌리는 왜구다. 정제되고 제도화된 현대적 일본지도부를 두고 뿌리를 왜구라 한다면 억울할 수 있겠지만 딱 잘라 현대사 100년만 돌아봐도 영락없는 도적 떼의 짓이 일제의 유전인자다. 왜구하면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땅이 울산이다. 기록에 숱하게 나와 있다. 

고려사를 보자. "울주는 땅이 기름지고 어염(魚鹽)이 많이 생산되어 부자가 많았는데, 경인년(1350년) 이후 매년 왜구의 침입을 받아 가난한 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부자는 이익을 탐하다 피해를 크게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존재한 당시 울산 출신 부호는 충렬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박구(朴球)라는 이다. 박구는 울주 소속의 부곡민(部曲民)으로 선대가 지금의 재벌이었다. 울산은 곽소(藿所-미역수집창)가 위치할 정도로 미역 등 물산이 풍부해 동해와 남해를 잇는 연안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은 왜구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려사의 또 다른 기록에는 왜구의 침략이 심각하다. 1361년(공민왕 10) 8월에 침략한 왜구는 울산을 약탈하고, 조운선을 탈취한다. 기세등등한 왜구는 울주와 언양, 밀양을 노략질하고 합포와 양주를 유린해 수많은 민초를 도륙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조선조 때는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해 관리를 볼모로 끌고 가는 일도 일어났고 그 일이 조선 외교의 일등공신 이예를 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려사보다 더 앞선 왜구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한다. "722년 10월에 모화에 성을 쌓아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성이 바로 울산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관문성이다. 경주의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성의 둘레가 1,023보인 반면 관문성은 6,792보 5척이나 됐다. 왜구의 노략질이 주로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신라의 지도부는 울산에 성을 쌓아 방어책을 삼았다. 조일전쟁 때 울산은 7년 전쟁의 거의 대부분을 왜구의 식민지로 지냈다. 고려조정이 왜구방어를 위해 쌓은 성의 돌들이 왜성의 기초가 됐고 울산의 장정들은 노역장에서 아녀자는 노리개로 왜구에 치욕을 당했다.

그런 일제가 을사늑약과 한일 강제병합을 단행한 이후 울산을 지목해 대동아 전쟁의 병참기지와 공업생산 전진기기로 만들려고 기획한 흔적이 일본인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의 '울산도시창설'이다. 이케다는 울산에 대해 "신라 왕경 경주의 외항으로 번창함이 극에 달했던 항구"라며 개발을 역설했다. 

이런 역사에도 현대사에서 울산은 왜구의 후예들에게 극진했다. 스스로 친선우호를 외쳤고, 애써 사절단을 보내 교류를 다짐했다. 하기, 니가타, 구마모토, 그리고 비젠시까지 철마다 사절을 보내고 청소년과 오피니언 리더들까지 수시로 만나 화들짝 웃고 얼싸안고 있다. 

왜 자매도시가 돼야 하고 우호협력도시가 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기나 한 것인지 딱한 일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우리는 형제라며 구역질 나는 지난 시절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지난주 남관표 주일대사가 일본 외무성에 불려가 모욕을 당했다. 일본 외상 고노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논의할 중재위원회 구성에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 대사를 불러 "무례하다"고 중얼거렸다. 일본 외교부 실무진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즉흥적인 발언이라고 한다. 고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에게 중간에 말을 끊어가며 '무례하다'는 거친 표현을 쓴 것은 다분히 의도된 시나리오다. 수많은 카메라가 라이브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한국 대사에게 거친 표현과 모욕을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자들이 아니다. 

두 가지다. 하나는 국내 반한감정을 자극하겠다는 정치적 의도이고 나머지는 뼛속 깊이 흐르는 대한민국에 대한 우월주의다. 너희 땅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가 유린했던 놀이터였다는 인식이다. 우라질, 일본의 극우지도자들의 유전인자에는 고노와 유사한 DNA가 촘촘히 박혀 있다. 

우리 사회는 일본의 무역전쟁에 연일 내부갈등 중이다. 죽창가까지 인용했던 조국은 친일척결이 요즘 가장 긴박한 업무가 됐다. 가장 최근의 페이스북에는 "강제 징용과 관련한 대법원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것은 정확히 일본 정부의 입장이며 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친일의 정의를 새롭게 했다. 조국은 얼마 전 80년대 운동권 노래인 '죽창가'를 페이스북에 올리고 대단히 만족스러운 감상문을 달기도 했다. 야권은 일제히 이같은 조국 수석의 발언들에 편 가르기, 친일 덧씌우기라며 반발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여권의 대일본 발언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최재성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대놓고 아베의 경제침략이 문재인 정부 흔들기라며 "국제무역질서를 무너뜨린 경제전범국으로 기록되는 결과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쯤 되면 일본의 고노외상이나 대한민국 정권실세들의 생각은 분명해진다. 한판 붙자는 거친 표현을 에둘러 수사로 포장하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번 사태를 읽는 이들은 한일 간 경제전쟁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통상을 무기로 앙갚음하는 아베 정부의 야비함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풀지 못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제의 극악무도한 조선침략이 지도부의 야욕과 비윤리적 본성에 있지만 대원군과 무능한 관료들의 안이한 대처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무한 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는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반응이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지극히 자발적인 동참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물론 일본에서도 맞대응 성격의 한국 제품 불매운동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본 내 한국 관련 불매운동은 극우세력 사이 '선동'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설명도 나올 만큼 기획된 경향이 짙어 보인다. 

이에 반해 우리 쪽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반일, '노아베' 분위기가 확산추세다. 이는 아베 정권의 부도덕성과 과거사에 대한 지속적인 외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반도체 소재를 대상으로 한 일본의 경제보복은 과거사 문제를 경제문제로 연결한 비열한 작태다. 무역에서 우호적인 상대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은 경제적 단교(斷交) 선언이다. 

아베는 왜 이런 식의 무리수를 자초할까. 그 배경엔 2차대전 이후 패전의 멍자국을 지우고 국제 사회의 중심이 되기 위한 아베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다. 침략과 지배라는 조상의 유전인자가 흐르는 아베는 국제관계에서 어떤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할 지를 잘 알고 있다. 

비난 성명을 내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은 이미 안중에 없다. 중재에 나설듯한 미국이지만 결국엔 자신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혹시 미국이 잠깐 정색을 하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을 준비도 된 자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여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우호적이라는 과거의 학습경험도 있다. 세상은 일본의 과거를 덮어줬다. 바로 그 국제사회의 작동 에너지는 경제라는 사실도 잘 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하나가 돼야 한다. 위정척사를 외치고 살을 바르고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하나가 돼야 아베의 구린내를 짓뭉갤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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