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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광복절에도 울산의 독립 영웅 박상진 의사의 공적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넘어갔다. 지난해부터 울산에서는 박상진 의사의 서훈이 재조정돼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지만 보훈처의 대답은 여전히 침묵이다. 

독립 유공자들에게 명예와 같은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국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수여 한 서훈이다. 문제는 이 서훈이 모두 5등급으로 분류돼 있고 그 분류에 공정성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최고 등급인 1등급의 '대한민국장'은 현재까지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도산 안창호 선생 등 31명이 받았다. 이동녕 선생과 이상재 선생의 경우 1962년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았다. 3등급인 '독립장'에는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박상진 의사와 고종 황제의 밀사로 활동했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등이 서훈됐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도 3등급을 받았지만 올해 초 문제가 제기돼 별도의 서훈으로 공적을 재평가했다. 

하지만 울산 출신 박상진 의사는 여전히 홀대를 받고 있다. 올해 초 울산시의회가 울산 출신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상훈법 개정법안 조속처리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울산시의회는 결의안에서 "무장투쟁으로 우리 민족 독립에 대한 희망의 등불로 산화한 박 의사 서훈을 현재 3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아울러 박 의사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상훈법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해달라"고 촉구했다.

울산시의회는 또 "박 의사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길잡이가 돼야 할 박 의사 명예를 되찾기 위해 울산시민과 함께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고 약속했다. 결의안을 발의한 박병석 시의원은 "박 의사 서훈(현 3등급) 결정 배경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한 역사 왜곡이 있었다"며 "우리에게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만큼 박 의사 서훈 등급을 반드시 올리고 상훈법 개정안도 조속히 처리를 촉구한다"고 당부했다. 시의회에 앞서 울산시 북구의회는 '고헌 박상진 의사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상훈법 개정 촉구 결의안'을 국가보훈처에 전달한 바 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한 것과 관련해서는 "유관순 선생의 경우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서훈 상향이 아닌,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 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한 공적 등에 대한 '추가 서훈'임을 참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북구의회는 현행 상훈법에 서훈 등급 변경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며 '상훈법 일부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위해 지역 국회의원과 협의하는 등 서훈 등급 상향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2017년 전쟁기념관이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에 헌신하고 순국한 고헌(固軒) 박상진 의사를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을 때 울산시민들은 내 고장 출신의 인물이 호국인물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울산은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독립의 의지가 어느 곳보다 강했던 항일투쟁의 중심 도시였다. 울산시도 최근 내 고장을 빛낸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해 후세에 널리 알리고 도시의 자랑으로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구상 중이다. 우리가 선열들을 기억하는 일은 내일의 위대한 여정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는 일이다. 박상진 의사는 울산사람이다. 울산이 낳은 근대 인물 가운데 박상진 선생은 단연 특출하다. 그는 1884년 12월 7일 울산 송정동에서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承旨)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出系)해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박 의사는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박 의사는 이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됐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박 의사가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해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실제로 선생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재산에 비례한 군자금의 의연을 통고하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했다. 

박 의사가 재평가되고 역사에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규정에 묶여 서훈 상향 조정을 반대하는 국가보훈처는 박 의사의 업적에 걸맞은 서훈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주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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