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일에 달렸다
잡일에 달렸다
  • 울산신문
  • 승인 2019.10.0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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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울주군장애인복지관 운영위원

일의 성공과 실패는 어디에서 판가름날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기도 하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일 때가 많다. 일의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보통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대게는 눈에 보이는 우아한 작업에 눈길이 먼저 간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성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의 성패는 고상한 작업의 이면에 숨어 있는 허드렛 잡일에 달려 있다는 걸 금방 안다. 눈길이 먼저 가는 우아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무한 반복적인 잡일이 본격화된다. 이 잡일, '노가다'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일의 성패가 달렸다. 끝이 없는 잡일에 좌절하고 지루해하면 일은 틀어지기 십상이다.


최근 일이다. 우연히 함께 밥을 먹게 된 기자 언론인 몇몇이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지역신문에 민주시민교육과 관련된 내용이 자주 나오던데, 교육청에서 이 교육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넌지시 물었다. 민주시민교육이 민주주의 원리를 학습하는 교육이라는 건만 막연히 알고 있던 나는 깊이 있는 내용도 모르고 대답할 자격도 없어 '잘 모르겠다'고 입을 닫았지만, 함께 밥을 먹던 기자 언론인들은 우리 교육법의 교육목표인 '바람직한 민주시민 육성'과 민주시민교육이 많이 닮았다며 시민, 시민성, 시민정신, 민주시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겁던 밥자리가 갑자기 난장판이 된 건 정치교육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다. 누군가 민주시민교육이 정치교육 아니냐고 불쑥 내지른 말에 정치교육이 민주주의교육이고 민주시민교육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당장 왜 정치를 신성한 학교에 끌어 들이느냐는 다소 무모하고 감정 섞인 갑론을박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말인즉슨, 아무리 민주시민교육 원칙을 지킨다고 해도, 어떤 권력이든 권력유지에 유리한 자기편을 양성하는 방편으로 정치교육을 악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전체주의적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금방이라도 밥그릇, 국그릇이 날아갈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사람은 의도한 대로 길러지는 것도 아니고 길러 내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이야기서부터 교육은 그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 이익을 조화시키도록 안내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이어졌다.


열띤 대화 속에서도 처음부터 묵묵히 듣기만 하던 나는 정작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만약에 정말 민주시민교육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민주시민교육의 목표나 내용, 교육방법을 설명하고 알리는 일보다 정치에 거부감을 가진 보통의 학부모, 평범한 시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더 어렵고 힘들겠구나 하는 점' 말이다. 정치교육의 '정치'가 이전투구하는 현실 정치판의 '정치'와는 다른 개념이며 현실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런 '정치'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런 '정치'로 착각하고 곡해할 기막힌 상황이 엄연한 현실이다. 때문에 민주시민교육이 정치권력의 획득과 유지, 정치체제와 관련된 관치교육으로 잘못 이해되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게 문제해결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염된 정치로부터 보호해야 할 학교에서, 더군다나 귀한 자녀를 상대로 이루어질 정치교육에 대해 평범한 학부모들이 가질 이런 생뚱맞은 오해를 어떻게 풀 것이며, 학교마저 정치판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보통 시민들의 막연한 두려움이나 생소함을 해소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  목소리 높인다고 장밋빛 기대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 교육이 정치교육이고서야, 당장 현실에서 부닥칠 학부모·시민들의 거부감을 씻어낼 논리를 준비하고 또 설득해 나가는 잡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된다. 민주시민교육의 목표와 과정, 방법을 아무리 설명한들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서야 성공은 커녕 시작도 어려울 것이라던, 그 밥자리 어느 기자의 말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설득하는 작업은 매우 느리고 변화가 더디다. 더군다나 그 설득 대상이 학부모와 시민이라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된다면 학부모와 시민들의 오해를 풀어나갈, 미련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지루할 정도로 느린 잡일, 즉 '노가다'를 지금부터라도 당장 시작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