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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어느 때보다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때로 기억될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와 민간 모두 뜻 깊은 기억과 계승을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 아베정부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노동자 판결을 시비걸며 수출규제를 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본불매운동 때도 커졌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수 없지만 일본불매는 할 수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필자도 올해 울산의 항일 독립운동 현장과 독립운동가를 찾아가는 기행과 강연에 어느 때보다 많은 요청을 받아 분주하게 보냈다. 100주년이 와 큰 관심을 보이다 이후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시민들을 만나왔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겪었던 일들 그중에서도 '국민보도연맹'으로 속해 학살을 당했던 일을 마지막에 함께이야기 했다.


'보도연맹' 이름을 한자로 풀어보면 보호(保)하고 이끈다(導)는 말이 담겨있습니다. 해방 후 북위 38도를 그은 선에 맞춰 냉전체제로 분단된 상황에서 만든 단체다. 1948년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다음 해에 이른바 '좌익'에 가담했던 이들이나 가족친지들을 묶어 국가가 나서 갱생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모집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벌어진 후 보도연맹은 학살의 표적이 됐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이 경찰과 함께 후방지역 보도연맹원을 모아 재판없이 즉결처형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참고하면 한국전쟁기간 남한의 민간인 사망자가 약 24만 5,000명이고 학살당한 자는 약 13만명이다. 그 시작점이 보도연맹이다.


울산은 한국전쟁 기간 북한 인민군이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었지만 보도연맹원 중 최소 874명(국가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이 군경에 끌려가 1950년 8월 경에 학살당했다. 그 속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분들이 적지 않게 속해있다. 동구 보성학교는 신간회와 건국동맹 등 항일에 앞장섰던 박학규선생을 비롯해 교사였던 분 중 4명이 해당된다. 보성학교 설립자였던 성세빈의 장남도 함께 희생됐다. 또 범서 입암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대전 골령골에서, 이관술의 동생과 맏사위는 울산에서 죽었다.


학살의 이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지만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것이다. 또 독립운동가의 형제나 자손이라고 연좌제처럼 옭아맸다. 하지만 학살된 다수가 이념 성향과 무관한 이들이었거나 '좌익'활동를 그만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들을 끌고간 경찰과 군대의 수뇌부는 대부분 친일과 부역의 과거를 지녔기에 통탄이 커질 일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60년 4.19혁명 후 잠시였다. 웅촌과 대운산 학살지의 구덩이에서 찾아낸 유골을 수습해 중구 성안동에 합동묘를 쓴지 7개월도 되지 않아 1961년 5.16쿠데타 후 계엄군은 유골을 모두 파내 화장 후 유기했다. 결국 다시 45년이 지난 뒤 2005년 12월 정부가 꾸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조사로 뒤늦게 진상이 드러났다.   

  
내년이면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해다. 울산시는 2020년 9월 준공을 목표로 중구 약사동 울산기상대 근처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한다고 지난 5월 밝혔다. 인근 경주를 비롯해 학살지역 마다 추모비나 추모공원이 들어서고 있는데, 울산도 다음 달에 착공에 들어간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은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됐고 해방 후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채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되면서 깊어졌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빚어진 상처들은 바로 이 순간까지도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는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이제 3·1운동 100주년을 거쳐 한국전쟁 70년을 기대리며 사회적 성찰을 넓혀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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