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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이 무르익은 지난 주말 울산에서는 그야말로 축제의 열기가 뜨거웠다. 흔히 울산을 두고 부자도시, 공업도시, 굴뚝도시라고 이야기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역사와 문화를 울산과 연관지어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해도시, 굴뚝도시로 알려진 울산을 찾아 직접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 본 사람들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점차 확산되는 증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울산시와 각 구군에서는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축제나 행사를 기획하고 이를 지역사랑과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로 연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문제는 지금 벌어지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정말 울산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느냐는 점이다. 울산을 사람이 모이는 도시, 시민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도시로 만드는 일은 속살을 보여주는 일이다. 제대로 보지 않으니 보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대충 알고 있는 것을 짜깁기해서 사실처럼 떠벌린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울산을 내공이 없는 도시로 만든 주범은 잘못된 공해도시 이미지와 유흥문화, 그리고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오피니언 리더들 때문이었다. 

비행기로 울산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울산은 굴뚝이다. 석유화학공단 상공을 추락할 듯 하강하는 공포와 함께 울산과 마주한다. 어쩌다 굴뚝 위로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불연소의 순간을 목격했다면 대단한 모험담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와, 울산에 갔더니 굴뚝에서 불꽃이 올라오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데, 장관이더라"는 식이다. 기차 타고 울산을 찾는 이는 과거 태화강역의 화려한 모텔촌과 함께 울산과 마주했다. 지금은 KTX 울산역이 울산의 관문이 됐지만 그쪽은 아예 황량한 시골들판과 오물냄새가 진동을 하며 독특한 환영 이벤트로 사람들과 마주한다. 

봄 여름 가을, 울산 곳곳은 축제 열풍이 분다. 그 축제를 들여다보면 요란함이 첫째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한결같이 가수들이 등장하고 요란한 불빛과 불꽃놀이가 밤을 새운다. 태화강에도 대공원에도, 아니 정자나 간절곶 바닷가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짜 맞춘 듯 일관성을 유지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것뿐이다. 보여줄 것이 그뿐이고 즐기게 할 것이 그뿐이니 딱히 다른 것들로 행사를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잘 나가는 가수를 불러 흥을 돋우고 요란한 불꽃으로 마무리하면 적어도 행사에 볼 것이 없다는 말은 듣지 않으니 주최 측의 심정도 이해할 법하다. 그러니 공연기획 회사들은 울산이 호구다. 바꿔야 한다. 아예 없애자는 말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요란하면 천박해진다. 내공이 없으니 소리만 지르다 지칠 때를 기다린다. 시간이 가고 몸이 지치면 불평도 사라지니 못해도 본전이다. 천박함이 문화일 수는 있어도 역사일 수는 없다. 

유속불식 무익어기(有粟不食無益於饑)라고 했다. 아무리 곡식이 많아도 굶는 사람을 먹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염천론(鹽鐵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속(粟)은 조를 말하지만 곡식이란 뜻으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조가 주산물이었기에 곡식의 대표주자로 사용했다. 산에서 쇠가 나지만 광석을 캐내 제련을 하지 않는 한 쇠가 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조가 밥이 되어 입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지난 주말 울산 남구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역사 문화와의 공존, 남구를 걷다'라는 이름의 탐방이었다. 남구에 무슨 역사가 있기에 역사와 문화의 공존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 남구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이번 행사의 코스였던 개운포와 처용암, 그리고 장생포로 이어지는 역사문화의 탐방길은 울산이라는 장소성이 갖는 웅대한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다. 개운포는 어떤 곳인가. 지금 개운포는 처용문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의 현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1,000년 전 이곳은 울산 반구동 항만과 더불어 서라벌의 거점 항만이었다.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는 서라벌을 중심으로 화려한 번창기를 구가했다. 그 당시 신라는 고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세계열강의 하나였다. 그 증거가 바로 개운포에 남아 있다. 8세기 무렵 세계 4대 도시는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 중국의 장안과 서라벌이었다. 당시 100만 인구가 거주한 서라벌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국제도시였다. 이슬람의 지리학자 이드리시나 후드라드베의 기록에 남아 있는 신라는 풍요의 땅이자 유토피아와 같았다. 문제는 지금의 시각으로 신라를 바라보는 데 있다. 고려조 김부식의 역사서 삼국사기에 의존한 우리역사는 많은 오류를 안고 있다. 그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라에 대한 기록이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한 이후 악랄한 방법으로 조선의 정신을 살해하려 했다. 그 작업의 한 축이 과거사에 대한 정리였고 역사서의 '분서갱유'였다. 1910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 해 1911년 말까지 1년  남짓동안 무려 20만 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이 땅 곳곳에서 51종 20만 권 정도의 서적을 수거해 불태우거나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때 사라진 책 가운데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나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등 귀중한 역사서가 대부분이었다. 사라진 역사서를 들춰볼 순 없지만 이슬람의 기록이나 중국역사서를 기초해 보면 8세기 무렵 신라는 우리의 상상보다 크고 웅장한 세계와 교류를 해온 국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8세기의 시각으로 신라를 바라보면 개운포가 보인다. 서라벌을 세계 4대 도시로 만든 힘의 근원이 개운포와 울산에서 나왔다. 개운포는 국제도시 서라벌이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교류의 현장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서역인이나 아랍인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개운포에서 시작된 역사다. 국제무역항인 개운포가 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운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 등에서도 통일신라 때에 경주를 배후에 둔 산업, 상업의 중심지로서, 신라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나타난다. 또한 개운포는 아랍 상인들이 많이 와서 살던 당나라 양주(揚州)로 가는 바닷길의 신라 쪽 출발지였으며 당시 신라와 교역하고 왕래하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물론, 동서교역의 주역인 아랍인들도 이용하던 국제항이기도 했다. 

처용문화제가 열리는 출발지인 개운포를 지나며 문득 울산이 과거 서역과 교통하던 국제무역항일 때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생각이 1,000년 전의 세월로 거슬러 가자 다시 천년의 세월이 지나 국제적인 물류시설이 들어서고 자유무역지대로 도약하는 오래된 미래가 펼쳐진다. 우리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였고 고여서 정체된 부동의 문화 보다 흘러서 교차하고 새롭게 변용하는 흐름의 문화였다. 이는 바로 신라 천년의 에너지를 제공한 국제무역항 개운포의 역동성이 원천이었다. 

놀라운 것은 또 있다. 바로 개운포 성지 인근에서 발견된 신석기 문화의 한 장면이다. 지난 2009년을 전후해 울산 신항만 연결도로 등이 곳곳에 개설되기 시작했다. 이때 조개무더기와 모래로 뒤섞인 땅속에서 예상치 못한 고래 뼈가 출토돼 학계는 물론 울산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골촉 박힌 고래 뼈'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매장물은 신석기인들이 사슴 뼈를 뾰족하게 가공한 골촉으로 그간 논란이 돼 왔던 신석기시대 포경 활동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물적인 증거였다. 바로 그 인근 성암동 패총에서는 신석기인들의 생활 폐기물이 쏟아졌다. 신석기인의 삶의 터전으로 고래잡이의 시작을 알린 땅이 신라 천년의 국제무역항이 됐고 그 항만이 조선조에 와서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으로 이어졌다. 

개운포뿐만이 아니다. 울산 곳곳에는 개운포 같은 보물창고가 여럿이다. 그냥 두면 폐허가 된다. 제대로 살려 오래된 미래의 옷을 입히는 일이 지금 울산인들의 책무다. 당장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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