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⑶ -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⑶ -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 울산신문
  • 승인 2019.10.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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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金庾信(김유신) 장군 탄생지로 가 봅시다. 진천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4㎞ 떨어져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1999년 6월 11일 자로 사적지로 지정됐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生後(생후) 1400년입니다. 역사적 중요 인물의 탄생지가 1400년이 지난 후에야 사적지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가 역사의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적지로 지정이 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베는 것도 모두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군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5년 동안 탄생지 정화사업을 그렇게 했어도 해놓은 게 없다. 화장실 두 개 지은 거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진천에서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복원하려고 합니다만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에서 승인을 안 해주고 있습니다. 승인을 안 해주는 이유가 첫째 지표조사를 해보라, 두 번째는 그 당시의 유적을 복원하는 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가다 보시면 '왜 하고많은 넓은 지역을 놔두고 김유신 장군 어머니인 만명부인께서-지금으로 말하자면 神的(신적) 능력이 있다는 분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터를 잡으실 때 만명부인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을 때-왜 거기다가 터를 잡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천군에서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 못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 기록에는'김유신 장군께서 계양마을 담안방에서 태어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담안방이라는 말의 의미는 큰 울타리 안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쪽에 보이는 산이 태령산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台(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령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왕족들은 台(태)를 모셨고 평민들은 台(태)를 태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태실 유적들이 남아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태실만큼은 못 건드렸다고 합니다. 중부 지방에 태실이 네다섯 개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김유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왕들의 태실이라고 합니다.

지금 천안 연구소에 계신 곽춘근 선생님은 '太古史(태고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환인께서 환웅에게 神市(신시)를 건설하고 홍익인간을 실천하라고 하시면서 天符印(천부인) 세 개와 삼천 무리를 내려주시고 신시를 열 때 風伯(풍백), 雲師(운사), 雨師(우사)가 다스리던 세 개의 지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 풍백이 다스리던 신성한 고장의 중심지가 지상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지상마을에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신 겁니다. 이런 설명의 근거가 되는 부분은 초기에 신시를 세운 위례성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 먼저 정립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곽춘근 선생님께서는 천안 북면이 위례성이라는 근거로 쓰신 겁니다. 풍백, 우사, 운사가 다스리던 지역이 진천, 안성, 천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안, 진천, 안성 세 개 시군이 행정협의체를 구성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용역조사를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이 김유신 장군 생가터로 지난 1999년 6월에 사적지로 지정된 부분입니다. 저기 보이는 부분 대략 7만 평이 사적지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生家(생가)는 없습니다. 생가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문화재청으로부터 승인을 못 받은 상태고요. 그렇다면 생가는 어디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 200~300m 떨어진 곳에 蓮寶井(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연보정이 삼국시대 때 쌓은 유적입니다. 경주에 있는 財買井(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같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우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생가는 역사상 성역화해 놨는데 김유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김유신과 이순신을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고 이순신은 비장한 생애죠. 장엄하다는 건 성공 스토리고 비장하다는 것은 비극이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았다면 틀림없이 모함에 걸려 제명을 다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이순신은 국가, 임금인 선조가 지원을 잘 안 해줘 독자적으로 외롭게 싸웠습니다. 게다가 나라에서는 열심히 싸우는 사람을 불러들여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순신도 나중에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김유신의 신라는 조선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줬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고 김유신 전기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김유신이 하자는대로 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하자는 대로 하니까 통일을 하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군인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난 장군은 성공했고 조선조처럼 군인을 멸시하는 시대에 이순신이 나오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난중일기 같은 걸 읽어보시면 답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김유신은 오래 사셨고 하고 싶은 것 다 했고 하는 그런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