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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가 1913년부터 언양현 동헌 객사 터 옆에 개교하였다. 학교 앞은 바로 영화루였다. 그 앞의 남문 4길은 언양읍성 마을길이다. 현재 골목길에는 읍성과 사람 그리고 마을의 역사를 그림과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골목길이 일제강점기 언양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삶터였고 항일 독립운동의 길임을 아는 사람이 적다.


1919년 4월 2일 언양에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항일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만세운동은 학교에서 200미터도 되지 않는 언양 시장에서 일어났다. 당시 학생들도 참여했지만, 명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 3월 졸업생이 그 이전 해보다 25명이나 적었다는 사실은 어떤 숨은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영화루와 학교 근처에 언양청년회관이 있었다. 신영업(2회), 신학업(3회)은 훗날 대한교과서를 만든 김기오와 함께 언양 청년운동의 구심점이었다. 1923년 언양 소년단을 결성했고 신근수(8회), 신말찬(10회), 신시돌(10회), 오영수(11회), 오호근(14회), 배기철(13회) 등은 아침 달리기, 소인극 활동, 가극대회, 체육대회, 웅변대회, 야학, 강연회 등 계몽 활동을 통해 항일민족 의식을 높여 나갔다. 신말찬과 오영수는 동요, 동시를 발표했다.


1927년 10월 일본인이 조선인을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가리야 사건'으로 언양지역은 항일 감정이 높았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도 했다. 소년단 간부 이동개는 “소년단원은 단결해 조선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일본인은 조선인을 압박을 하니 일본인의 상품을 사지 말아 일본인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고 했다. 1928년 12월 언양소년단의 김동하(6학년)가 언양 주재소에 “대한독립 만세" 종이를 부착해 간부 이동개와 함께 체포됐다.


김동하는 만국기를 그리라고 하면 가운데에 태극기를 넣는 학생이었다. 일본인 검사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 의식은 장래 무엇을 목적하는 확실한 신념을 가졌다"며 두 사람에게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1929년 12월에 징역 8개월을 살고 나온 이동개를 환영 나온 언양소년단원 100여 명은 비를 맞으면서 소년단가를 높이 부르며 소년단 회관까지 행진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개됐다. 이 영향을 받은 언양소년단원 오호근이 1930년 1월 언양 주재소 부근에 격문을 뿌려 체포돼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또 1932년 5월 언양에서 격문을 뿌린 홍정수가 체포됐다. 1930년대에 신영업, 신학업, 이동개 등은 소작농의 권리 옹호를 위한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울산과 양산에까지 사회활동을 넓히며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두서 출신의 배기철은 양산 통도중학교에서 배일 민족교육을 하다 고초를 겪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김수선(12회)과 농지개혁에 앞장섰다.


영화루 읍성 안쪽 2층집은 오영수, 오호근 형제의 집터다. 성 앞 잔디 광장 왼쪽 끝에 정인섭과 신고송의 집이 있었다. 윗채는 부자인 정인섭, 아래채는 가난한 신말찬이 살았다. 민속학자, 영문학자. 어린이 운동가였지만 학도병 참전을 권유한 친일 부왜인 정인섭과 달리 신말찬은 일제에 항거하며 어린이 운동과 소인극 등 항일 문학활동을 하다가 감옥을 갔다. 그 앞집에 언양소년단 사건으로 투옥된 이동개가 살았다. '읍성작은도서관' 왼쪽 집이 언양, 양산의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앞장 선 신영업과 신학업 형제의 집이다.


우석 김기오는 언양 항일운동의 대부였다. 그는 『현대문학』을 창간해 오영수가 문학 활동을 하도록 도움을 줬다. 그 인연은 1920년대 언양소년단이었다. 소년단 아이들이 아침 나팔소리를 듣고 일어나 달리기를 하니 소파 방정환이 격려의 박수를 한다. 신영업, 신학업 그리고 김기오가 앞장서고 뒤이어 신근수, 신말찬, 신시돌, 오영수, 이동개, 김수선, 배기철, 오호근, 김동하, 이순금, 홍정수 등이 소년단가를 높이 부르며 격문을 뿌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어깨동무하며 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언양초등학교 학생들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존재한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해 오늘에 되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굴종의 나라가 될지 모른다. 자주의 나라가 되는 길은 절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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