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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헌에서

김미정

탑은 강에 기울어
저 달을
끌어당기고

나무는
탑에 기울어
슬며시
기대서도

곱다시 기울어지는 건
흐름 속의
저,
달뿐

△ 김미정 시인: 동아일보신춘문예(04) 시집 '고요한 둘레' '더듬이를 세우다', 2017년 현대시조 100인선 '곁' 외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등.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연대(連帶)라는 말이 참 좋다. 세상에 함께하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삶은 서로 어깨 걸고 나아가는 일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내 한쪽을 내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옥개석이 부서져 흩어진 어느 폐사지에서 저물도록 오래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어둑살이 깊어질 즈음 바라본 달은 눈 부셨다. 그 아래로 흐르던 산골짜기 물에 씻겨 내려가던 달빛의 흰 그림자가 그렇게 애련할 수가 없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둥지로 돌아온 먼 새소리까지 하나의 하모니가 돼 주었다.
내(川)를 건너가다 말고 다시 돌아봤다. "탑은 강에 기대어 저 달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만이 아니었다. 말없이 내어주는 서로의 푸근한 배려였다. '탑' '강' '달', 그들의 조응은 말 그대로 하나의 그림이었다.


시인들은 저 셋의 이미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이 시로 승화시켰던가. 그러나 가만히 발음을 해보면 셋 다 모음 'ㅏ'로 인해 뭔가 모를 이미지가 지향하는 바가 달라 보인다. 단절이 아니고 나아감이다. 나아가서 흩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는 묘한 어울림이 있다. 그때 주위에 있던 나무가 슬며시 탑에 기대본다. 나도 여기서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한다. 그 마음 모를 리 없는 탑이다. 천년을 견뎌온 이력이 있다. 못 본 것보다 본 것이 더 많은 세월이다. 그냥 살아온 연륜이 아니다. 다 아는 누긋함이 있다. 그래서 아무런 말이 없어도 슬그머니 안아 준다. 토닥여 준다. 꼭 연인 같아서 마음이 애잔하다.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어'라는 다정함이 있다.


그때 "곱다시" 즉, 무던히도 곱게 강물에 저를 맡기며 흘러가는 은은한 달빛만이 적요하다. 시간의 흐름이고 강물의 흐름이다. 탑은 저렇게 보내온 시간 앞에서 동요도 흔들림도 없다. 그냥 다 안다. 달도, 강물도, 나무도 흔들리며 흘렀고 또 그렇게 가는 것을. 혼자 남아 저 깊은 적막을 오롯이 견디며 왔다. 탑은 기다림이고 인내고 견딤의 상징이다. 청태가 끼고 모퉁이가 깨어져도 그것만이 자신을 지켜온 자존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글에는 형(形)과 태(態)가 있다고 했다. 즉, 외형(外形)에 속지 말고 내태(內態)에 집중하란다. 우린 너무 밖에 집중하며 보이는 그 이상의 너머에 깊은 내면이 있음을 잊고 왔다. 여강(驪江)이 흐르는 '간월헌' 앞에 선 시인의 시선이 조금의 현혹도 어울리지 않는 수심(水深)에 수심(修心)이 그득하다.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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