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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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신문
  • 승인 2019.11.2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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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이사겸 편집국장

제2 천안문 사태로 확산되나 싶었던 홍콩 사태가 수습국면에 들어갔다. 범민주 진영의 압승으로 끝난 홍콩 구의원 선거 결과가 한 몫을 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중국 정부는 '서방 세력 탓'으로 돌리며 '집안 단속'에 나선 상황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홍콩은 중국의 일부"라고 대못을 쳤고 "홍콩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어떤 시도나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망치려는 행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홍콩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강조했다. 

중국 관영 언론은 시민들이 폭력 시위를 지지한 것은 아니라며 이번 선거 결과의 의미를 애써 깎아내렸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범민주 진영의 승리는 유권자들이 폭력을 지지한다는 표시는 아니다. 홍콩에서 도시의 혼란을 끝내는 것은 여전히 최우선 과제이며 이번 선거는 폭동을 끝내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고 평가했다. 

중국정부와 영국 정부간의 홍콩 반황협정으로 지난 1997년 7월 1일 155년 식민지 역사를 청산한 홍콩은 분명히 중국 영토의 일부다. 당시 반환협정으로 홍콩은 세계사상 최초의 1국가 2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홍콩은 중국의 국제 협력의 중계지로서, 근대화를 위한 남쪽 창구로서 기능해온 요충지다. 

흔히 우리가 홍콩으로 부르는 지역은 홍콩섬과 주룽반도의 주룽, 신계와 부근의 섬들을 포함하며, 면적은 1,104㎢이다. 명(明) 나라 당시 향나무를 중계운송하기 시작하면서 '샹강(香港)'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홍콩의 지명유래다. 홍콩은 샹강의 광둥어 발음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것은 아편전쟁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외교와 통상권을 아편밀매로 잠식하려 한 영국의 계략은 절묘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고위관료는 물론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떠도는 유민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로 맞섰고 결국 영국 정부는 중국무역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20척의 함선과 4,000여 명의 원정군으로 세계사에서 가장 탐욕스럽고 부끄러운 전쟁에 돌입했다. 

그 전쟁의 여파로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됐고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오지에 불과했던 홍콩섬은 1905년에 주룽과 광둥을 잇는 철도가 개통되고 물자의 집산지, 해외로 진출하는 화교(華僑)들의 거점으로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올해 벌어진 홍콩 민주화시위는 표면적으로는 강제송환법에 대한 반발이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일국양제 침해에 대한 반발심리가 뿌리에 작용하고 있다. 덩샤오핑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올수록 중국 공산당의 홍콩 통제와 탄압은 강화되었고 그 반발이 우산시위, 복면시위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서방에서는 홍콩이 중국의 분열을 촉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