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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것과 같고,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서산대사는 즐겨 이 시를 읊었다.
 인생이란 허무하다. 이 허무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생전에 많은 일을 하고 죽은 뒤에 업적을 남긴다. 인류를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위인으로 떠받들게 되고, 작은 일을 한 사람에게 조차 그 출신지역에서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인물상, 흉상, 추모비 등)같은 것을 세운다. 하지만 인생에 인류를 위하고 국가, 민족을 위해 업적을 남기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억겁에 비하면 한 생애가 티끌보다 더 미미하다. 이 촌음과 같은 삶에 남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함을 남겨 놓고 떠난다는게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이유수 선생 인물상 제막


 지난 6월 13일 중구 복산초등학교 교정에서 현곡 이유수 선생의 인물상 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참석한 인사들은 유족과 향토사연구회원, 생전에 친분을 가졌던 지역인사들이었다.
 현곡 이유수 선생은 경주시 현곡면 내태리에서 부친 이일생이 중구 복산동 575번지로 이주하여 1926년 4월 8일에 태어나셨다. 현곡선생은 성장하면서 이곳 복산초등에 입학하여 졸업하셨기에 모교인 교정에 인물상을 세우게 되었다.

 

   2년을 위치선정문제로 허비


 향토사연구회원들은 지난 2007년 10월 월례회에서 추모비 건립이 논의되면서 즉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3분과로 나눠 일을 추진했다. 추모비(가칭)제작담당, 재정담당, 비문담당 으로 여러 차례모임을 가졌다. 2년여 가까운 시간의 소요는 비 건립 위치 선정 때문이었고, 그 선정의 배경에는 도저희 이해할 수 없는 지역 이기주의가 내면 깊숙이 내재하고 있었다. 현곡선생은 울산문화원 부원장직을 맡아 박영출 원장을 보좌하면서 많은 향토사를 정리하여 책을 펴냈다. 특히 '울산지명사'는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방대한 지명을 조사하여 책을 펴냈다. 이 지명사는 울산의 지명사전이며, 영구히 우리곁에 있어야할 지명연구서이다. 그래서 지난 6월 18일자에 쓴 김종경기자의 칼럼에서 '남구지명사도 현곡선생이 조사한 울산지명사를 초석으로 하고 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 누가 무어라해도 현곡선생의 저서들은 울산을 대표할만한 향토사의 대역저임에 틀림이 없다. 이뿐이던가? 현곡선생이 쓴 역저는 여러권이다. '울산향토사보'를 비롯해 '울산향토사논총', '울산문화재총람', '울산지명사' 등 이다. 이 이외에도 여러 논문이 단행본으로 묶어지지 않은채 흩어져 있다.

 

   대상지엔 '불가'…결국 모교에


 현곡선생의 인물상 제막이 있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인물상'으로 명칭을 정할 때까지도 여러 명칭이 제시되었으나 최종논의에서 '인물상'으로 정했다. 이 상을 새우기 위한 첫 번째 대상지는 남구문화원 뜰이 었으나 문화원과 몇 지역인사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차선책으로 중구 복산공원을 염두에 두고 중구청과 논의 하였으나 구구한 변명으로 일관. 끝내 건립불가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모교교정에 어렵게 장소를 얻어 건립하였다.
 인물상 건립과정에서 한결같이 재기되는 말인즉 "그 분이 무엇을 했길래 비문(인물상)을 세웁니까?"이다. 반문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 문화를 저버린 배금에 물든 무식이 최고 무기인것 같았다. 이들도 지역이기주의 무리들 보다 더욱 문맹의 미아들이 아닌가 싶다.


 현곡 이유수 선생의 인물상 건립에 애쓴 향토사 연구회원들과 터를 허락해준 모교 관계자에게, 그리고 애쓴 모든 사람들께 추모상건립위원의 한사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이 한편의 시는 결코 우연한 삶과 죽음을 노래한 시가 아닌 깊은 의미를 제시 해주고 있어 다시 읊어 보며 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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