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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좋아한다'는 것과 분명 다른 차원의 세계다. 명품브랜드를 좋아하고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를 좋아하고 곰 인형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만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대리만족을 위한 '엔조이'의 개념에 충실하지만 사랑은 결코 대리만족의 대상일 수 없다. 사람은 한 살이 속에서 수많은 좋아함과 사랑함을 반복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도 그 대상 중의 하나다.
 울산은 필자에게 낯선 도시였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조교생할을 하던 시절, 느닷없이 시작된 울산과의 인연은 낯선 도시로 나를 이끌었다. 벌써 20여년이 지났지만 그 때만해도 필자는 울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울산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끈 산업 수도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울산 땅을 밟았다. 뜬금없이 과거사를 풀어놓는 것은 바로 이 '무지'의 출발점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이다.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인 울산이 대한민국의 산업메카로 변모하면서 필자와 비슷한 경로로 울산에 정착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110만 울산시민 가운데 80% 이상이 원적지는 울산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증거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40여년의 세월 동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울산에서 가정을 꾸리고 그들의 자녀가 다시 자녀를 낳아 살고 있는 새로운 고향이 됐다.

 사람들은 흔히 울산을 '잘사는 지방도시' 정도로 인식한다. 여기에 몇 마디 수식을 붙이라고 하면 '공해도시'와  '태화강의 기적' 이라는 얄궂은 부조화를 연결하기도 한다. 세상의 변화에 민감한 이들은 '연어가 돌아오고 태화강에서 수영을 하는 생태도시'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마디 이야기가 진도를 더하면 "밤 문화가 요란하고 문화적 인프라가 빈약한 천박한 도시"라고 시비를 건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슬슬 피가 끓는다. "서울은, 아니 부산은, 뭐가 그리 별반 다르다고 지랄이냐"는 말이 목젖까지 깔딱깔딱한다. 회오리 같은 현대사를 타고 흐른 대한민국 어느 도시든 문화 따위는 사치품목 1순위였고, 헐떡거리며 일과를 끝낸 뒤 차오르는 젊음의 늦은 밤엔 소주잔이 애증의 1순위였음을 거역할 순 없다.


 소주잔과 문화는 이음동의어다. 적어도 울산에 대한 '무지'는 소주잔과 함께 분해되고 그 자리엔 스스로가 만든 새로운 '울산'이 석회동굴의 석순처럼 자라기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울산은 울산을 알아가려는 새로운 울산인들에게 아무런 텍스트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오염의 강이라 치부되는 태화강과 차창을 열면 숨통이 콱 막히는 매캐함이 울산을 가득 채웠을 뿐, 이 땅이 선사의 뿌리라는 사실과 신라와 세계의 통로였음을 알려주는 어떤 텍스트도 없었다.
 울산의 산하에 말뚝을 박고 땅의 음기와 하늘의 양기를 온몸으로 뒤섞으며 사는 동안, 40년전 아니 그 이후 울산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이제 온전하게 울산이 자신의 몸이 됐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태화강변을 거닐고, 대공원 오솔길을 돌아 솔마루길을 밟는 여유는 과거에 비하면 차라리 호사다. 박물관이 들어서고 처용무가 세계유산이 됐다는 뉴스가 잇따르고 반구대암각화로 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발길을 옮기는 소식을 접하면서 울산사람들은 조금씩 울산을 공부하고 싶어졌다.


 공업도시로만 알고 이 땅을 밟았다가 이제 생태환경을 자랑하는 녹색도시로 거듭난 것에 가슴 뿌듯했는데 이 땅의 역사와 문화가 이처럼 깊고 옹골찼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는 게 울산사람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유난히 올해 들어 '울산학'이 주목을 받고 지역사회의 문화를 공유하려는 단체 결성이 잇따르는 이유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울산에 대한 사랑은 울산을 알아가는 공부의 과정이 출발점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울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울산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체계적인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 시정부가 해야 할 우선순위라는 박맹우 시장의 지론은 고무적이다.
 좋아하는 것은 즐거움의 유효성이 떨어지는 순간 버려지기 마련이다. 울산의 고래고기를 좋아하고 불고기를 즐기는 이들은 굳이 울산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즈벡의 관료이거나 일본의 장사치가 울산의 음식을 즐기고 오묘한 맛에 혀끝을 유린 당했다고 해도 그들이 울산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말에는 염려와 그리움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하는 대상은 온몸으로 부딪히는 학습을 통해 가슴 한켠에 사랑이 자리했기에 염려와 그리움이 혈액처럼 녹아 흐르기 마련이다. 그 사랑의 행렬에 울산사람 모두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울산공부'를 위한 보다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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