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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제일중학교 교가에는 '왜적부순 신학성 충혼을 묻고/ 절개받은 창표당 선열을 찾아 / 기뤄닦자 닦기는 전통의 정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신학성은 고려조 이후 울산의 심장이었던 계변성 성주 박윤웅장군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창표당은 조일전쟁 당시 서생지역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6인의 충렬을 모신 사당이다. 박윤웅 장군이나 창표당의 충렬들은 모두 이 땅에서 왜인들을 몰아내고 향토를 지켜낸 인물들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학교의 교가에 나오는 이들의 흔적은 이 땅에 없다. 계변성의 흔적은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파괴됐고 창표당 역시 서생포 왜성에 묻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울산에는 신라시대 이후 수많은 건축물이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이 왜인들의 노략질과 조일전쟁의 수난사에 희생됐다. 울산근교의 대표적 신라 사찰인 망해사와 간월사, 석남사, 감은사 등에다 언양읍성, 병영성, 울산향교 등이 대부분 왜인들의 손에 불타고 파괴됐다. 오늘 우리가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고 건물의 터와 형태를 쫓아 외관을 만들고 모양을 잡아 나가는 일은 과거의 웅장함을 재현하기 위한 뜻만은 아니다. 고증이 어렵고 형태의 원형이 모호한 것을 애써 찾아 연결하는 작업에는 사라지고 없어지고 헝클어진 우리의 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울산의 랜드마크가 될 태화루의 밑그림이 나왔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네 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될 태화루는 누각 자체의 웅장미는 물론 태화강의 경관과 조화를 살린 걸작이 될 전망이다.
 얼마 전 울산시의회에서 서생포왜성을 두고 시의원과 담당 국장간의 질의응답이 있었다. 질문을 한 의원은 서생포 왜성을 일본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복원·개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요지의 말을 했고 담당 국장은 "일본인에게 맡길 경우 우리 국민적 정서로 비춰볼 때 반발이 있을 수 있다"고 답변했다. 지난 역사의 흔적이 초라하게 방치돼 있는 것 보다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여 관광상품화 하자는 제안이다. 지역구의 경제활성화를 넘어 울산의 문화상품을 하나 더 보태려는 시의원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맞다. 서생포 왜성은 일본 관광객들이 구마모토성과 닮았다는 유사성에다 그들의 전쟁영웅 가토 기요마사의 충혼이 서린 돌덩이가 층층이 쌓여 있어 유난히 애착을 갖는 곳이다. 그 시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울산시에서 예산을 들일 필요 없이 관심 있는 일본인에게 복원과 개발 프로젝트를 맡기고 일정기간 임대해준 후 기부채납 형식으로 되돌려 받는 방안은 어떻겠느냐며 그럴듯한 안까지 내놓았다. 손도 안대고 코풀 수 있는데 시원하게 코 한번 풀어보자는 식이다. 풀고 난 코 등과 양쪽 볼때기에 검정이 묻든, 똥 찌꺼기가 묻든 대수냐는 식이다.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축성명령이다. 같은 해 5월 서울에서 퇴각한 가토는 서생포를 근거지로 성을 쌓았다. 조일전쟁 직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다. 이는 한강 이남의 4도 기점으로 대륙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히데요시의 계략이었다. 그 전략적 거점이 바로 서생포 왜성이다. 당시 왜군은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서생포 사이에 30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 가운데 서생포왜성은 부산왜성에 이어 3번째로 지은 석성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이 효율적이어서 전쟁 과정과 그 이후의 전략까지 고려한 철옹성으로 건립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가토는 왜성을 쌓으며 고려와 조선조 때 왜적의 방어선이던 수군만호를 허물어 그 돌을 왜성축조에 사용했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자산이 왜장의 손에 헐리고 그 돌이 왜성으로 변한 셈이다. 그 뿐이 아니다. 가토가 왜성축조에 동원한 울산의 장정들은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축조공사를 마쳐야 하는 지옥공사 일정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축성과정에서 셀 수없는 많은 장정들이 황천길에 올랐다. 가토는 왜성을 완성한 뒤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조선처녀들을 농락하고 그 것도 모자라 목도에 별채를 짓고 향락의 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 환락의 성이 서생포 왜성이다.


 일본 역사의 전쟁영웅 가토가 서생포 왜성에서 그 후손의 자본으로 부활하면 줄지어 몰려드는 일본 관광인파에 서생이 들썩거릴지도 모른다. 역사는 어제의 기록이지만 내일의 좌표라는 점에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대의를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맞는 말이다. 치욕의 역사를 허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유물로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자는 탁견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를 철학적 명제로 대입하는 것은 혀끝의 달콤함에 취한 소아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영웅은 그네의 땅에서 충분히 복원돼 있다. 굳이 이 땅에 그들의 더러운 돈을 깔아 성을 치장하려 한다면 돌덩이에 깔린 이 땅의 원혼은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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