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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아침, 국제마라톤대회를 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 찡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애증(愛憎)이 교차했던 이봉주 선수를 보면서 "이번에는"하고 기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나이를 감안해 져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레이스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어! 어"하며, TV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설마"했던 국민적 기대를 그는 십이분 달성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풀코스 42.195㎞를 2시간8분4초 기록으로 완주했다. 그것도 마라토너로서는 환갑을 지났다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이룩한 대기록이다. 이번 대회는 그에게도 '제3의 전성기'를 여는 서곡이 되고 있다. 이봉주가 처음 풀코스 마라톤을 뛴 것은 1990년 10월 제71회 전국체전. 만 스물을 갓 넘긴 새내기 마라토너가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차지하자 국내 마라톤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한국 마라톤을 주도했던 승부사인 고(故) 정봉수 감독 사단에서 세계적인 철각으로 거듭났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봉주는 2시간12분39초로 은메달을 목에 건다. 첫 전성기는 금메달 못지않게 화려한 은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에 발생한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팀을 떠나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선수 생활의 최대 위기였다. 삼성전자 육상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봉주는 2001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위에 그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1년 4월17일 제105회 보스턴마라톤. 서윤복, 함기용 옹의 발자취를 더듬어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귀국 직후 카 퍼레이드를 펼치며 올림픽 우승자 못지않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전성기를 보낸 이봉주는 또 시련에 휩싸였다. 2001년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스 도중 '타월'을 던졌다. 주변에선 슬슬 은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을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육상계에서는 하루 빨리 '포스트 이봉주 세대'를 이끌 차세대 주자를 발굴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포스트 이봉주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마라톤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고, 오늘의 영광을 일궈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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