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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에 발생한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팀을 떠나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선수 생활의 최대 위기였다. 삼성전자 육상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봉주는 2001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위에 그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1년 4월17일 제105회 보스턴마라톤. 서윤복, 함기용 옹의 발자취를 더듬어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귀국 직후 카 퍼레이드를 펼치며 올림픽 우승자 못지않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전성기를 보낸 이봉주는 또 시련에 휩싸였다. 2001년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스 도중 '타월'을 던졌다. 주변에선 슬슬 은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을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육상계에서는 하루 빨리 '포스트 이봉주 세대'를 이끌 차세대 주자를 발굴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포스트 이봉주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마라톤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고, 오늘의 영광을 일궈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