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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청동기 시대부터 고래의 서식과 번식지이다. 천혜의 염포만은 주변경관이 한적하고 먹이사슬이 풍부하며 수심이 깊어 고래의 서식지로는 최적지였다. 태화강 상류인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3천년 전의 바다환경과 회유하는 고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비친다.
 여러 종류의 고래 가운데 특히 귀신고래가 유독 동해에 많이 있었음을 울산만 같은 지리적 환경적 최적지였으므로 귀신고래의 모향이기도 하다.
 1904년 2월 10일 일본해군은 동해안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러시아 포경선을 포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이로써 고래잡이로 야기된 러일전쟁은 맥없이 러시아가 패전하여 모든 대한연안에 설치하였던 포경기지는 하루아침에 일본에게 넘겨지고 만다. 이때부터 동해안에서는 일본의 고래잡이 독무대가 되어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때가지 승승장구하여 왔다.
 장생포와 방어진에 있던 모든 포경선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단 한척도 한국 연안에는 포경선이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연안에서 물을 뿜는 귀신고래가 상당수 있었으므로 이를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던 일본포경회사에 종사하였던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배를 구입하자고 논의하였다.
 이때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김창옥은 일본수산(주)의 사장을 만나서 한국인 종사원들의 퇴직금 20만 엔을 받았다. 나머지 30만 엔과 본인의 전재산을 처분하여 합친 돈 약100만엔으로 일본수산(주) 소속이던 노르웨이식 포경선(목선) 제 6~7세 이카이마루 2척을 구입하였다.
 대부조건으로 1년이상 쓸수 있는 화약, 로프 등 일체의 자재를 싣고 귀국하였다. 제7정해호로 이름을 바꾸고 4월16일 첫 출항에 나서 순수 한국인의 손으로 범고래 한 마리를 포획하였는데 장생포 포경관계자뿐만 아닌 주민들도 흥분된 분위기였다.
 한편 방어진에서도 백두선(白斗善)이 일정 때부터 일인들과 손잡고 정어리와 저인망을 해오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으로부터 포경선을 구입하여 포경을 시작했다. 울산포경조합장을 맡았던 백상건(白尙鍵)은 약관 20대의 청년기 때부터 맏형 백두선 밑에서 수산업을 배우며 경영의 자질을 쌓았다. 이들 연고지는 언양 두서면이였으나 일찍이 대현면 부곡리로 옮겨왔다가 일정초기 방어진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백두선, 백천건, 백상건, 백사건 4형제가 모두 전문 수산업을 경영하였다. 포경선, 저인망, 정어리잡이, 근착선까지 거느리며 상어잡이선까지 확대하였다. 이로써 장생포와 방어진은 울산 고래잡이의 명성을 국내뿐만이 아닌 세계 각국의 포경국에게 이름을 떨쳤다.
 일본인들이 1914년 이후로 일본연안에서 사라져가는 귀신고래를 안타까워하면서 한반도 연안으로 눈을 돌려 1910~1933년까지 20여년간 통계에 의하면 5천여마리의 귀신고래를 포획하여 이미 멸종에 이르게 된 상태였다.
 이후 1946년부터 1950년까지는 제대로 체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6.25동란이 끝난 이후부터 1960~70년대의 10여년간 한국포경의 전성시대였다. 1986년에 들어 전면 상업포경이 중지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미 한국, 일본연안 뿐만이 아닌 동해상에는 단 한 마리의 귀신고래도 존재하지 않는 멸종의 마침표를 찍은 상태이다.
 2005년 IWC가 개최된 지 벌써 3년이 지나고 올해도 변함없이 고래 축제가 시작되고 있다. 시민들과 찾아온 외래 관광객들은 식탁에 오른 요리된 고래고기를 먹고 즐길 뿐,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물을 뿜는 모습이나 어미 등에 업힌 고래의 형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이미 귀신고래가 사라진 바다는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극경회유해면'이 아니다. 여느 바다, 평범하고 볼품없는 일상의 바다일 뿐이다. 이미 늦었지만 선사인들의 지혜와 생활의 여유를 찾아 지금이라도 고래가 돌아올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하루 빨리 귀신고래가 회귀하여 세계 제1의 고래관광 명소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캘리포니아 고래관광 사업을 따라잡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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