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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선비가 피나는 노력 끝에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하는 길이었다.
 며칠 후 고향 마을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이르자 갑자기 말에서 내려서더니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소피를 보는 줄 알았던 그 선비가 싸리나무에 대고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이 싸리나무 회초리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의 영광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체벌 문제가 시끄러울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고 회초리의 고마움을 잊고 있는 세상이 안타까워진다.
 교사나 부모가 감정이 격해져서 폭력적으로 체벌하는 것은 절대 있어서 안 되는 일이지만, 한 다발의 회초리를 꺾어다 놓고 아이들을 바른 길로 가르치는 엄한 부모나 스승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에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매의 교육 효과는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오히려 아이들을 더 질기게 만들 위험이 있고 매 맞고 자란 아이가 폭력적으로 자랄 위험성도 크다고 한다.
 그러나 엄한 회초리 몇 대가 보약보다 더 귀한 약이 되는 경우가 있고, 말보다 매가 더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성향의 아이들이 있다.
 무조건 체벌은 안 된다기보다는 회초리를 들 줄 아는, 그리고 그걸 용인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어렸을 때 꽤나 개구장이였던 필자 역시 심심찮게 회초리를 맞고 자랐다. 때로는 회초리가 감정이 개입된 '매질'로 변한 것을 맞아도 보았고 때려도 보았다. '매질을 당할' 때는 억울했으며, 교사시절엔 '매질을 해대고'나서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사랑의 매'로 시작했지만 '매질'이 되어 버리고만 회초리를 그 이후로 다시는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어린 나이였어도 매를 맞을 때 '사랑의 매'와 '폭력의 매질'은 구별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나 스승님께 회초리로 엄하게 혼날 때 그 순간 두렵고 아팠지만 내 잘못이 확실한데다 부모님과 스승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받아들였었다.
 내 잘못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고 매가 아팠던 만큼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교원 평가 제도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많은 교사들은 교원의 질을 향상시키는 근본적인 제도가 될 수 없고 오직 교원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악법이 될 뿐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회초리를 드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겠으며, 그런 마당에 과연 사랑의 매를 들려고 하는 교사가 있겠느냐고 한숨을 쉰다.
 부모에게조차 회초리는커녕 왕자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며 자라난 요즘 아이들에게 교사가 회초리를 대는 일이 과연 우리 세대들처럼 받아들여질까 걱정스럽긴 해도, '사랑의 매'와 '폭력의 매'를 구별 못할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오히려 회초리를 드는 스승의 감정을 견제해 주어서 회초리가 제대로'사랑의 매'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것일까.
 나는 가끔 꿈꾼다. 정년퇴임하는 날 평생 몸에 지니고 살던 회초리 하나 기념으로 남겨서 처음 교단에 서는 신규 교사에게 물려주는 아름다운 전달식을.
 스승의 날이 되면 촌지가 아니라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 한 다발 스스로 만든 학부모들이 교문으로 속속 들어서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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