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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30~40대에게 어머니를 불러보라고 하면 가슴부터 먹먹해져 말을 잘 잇지 못한다. "죄스럽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서다. 직장을 잡아 결혼하게 되면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던 그 많은 다짐과 약속도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혼과 동시에 들이닥친 부양가족, 아내와 자식을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부모님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러면서 곧잘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을 자식에게 쏟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 합리화다. 물질적인 배려가 전부는 아니라지만, 이를 팽개쳐두고 립 서비스만을 한다는 것도 너무 얼굴 간지러운 일이기에 자꾸만 멀어져 간다. 안부전화라도 드리려다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오는 죄스러움에 그만 전화기를 놓기가 일쑤인 이 땅의 아들이고 가장들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어머니 무덤 앞에서 목 놓아 통곡해야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재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술이라도 한 잔 얼큰해지면 '어머니 은혜'를 부르며 소 울음을 우는 자식, 오늘만은 제발 이런 바보짓을 그만두고 안부전화라도 한번 하는 아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연세에 비해 너무 늙어버린 어머니를 뵙기가 민망해 찾지 못하는 아들들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 젊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어머니 또래의 노인들을 보고 '못난 아들'을 자책하는 아들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식들이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기대로 오늘도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갈 뿐이다. 고전에 나오는 거창한 효(孝)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부모님을 얼마든지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이 없어 못해드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습관이다.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진 행동이 이제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굳어져서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만 감사하고 행하면 된다. 먼저 전화안부부터 해 보자. 부모님이 기뻐할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쓸데없는 전화는 하루에 수 십 통씩 하면서 그 단순한 안부전화를 못할 것이 없다. 이것에 조금 익숙해지면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닐 때도 들여다보는 습관을 기르자. 어린 손자손녀를 가슴에 안겨드리는 것만으로 효는 반쯤 성사된다. 아랫목에 불은 제대로 들어오는지를 살피는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님의 노후는 외롭지 않다. 어버이는 자식이 효도를 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주희 선생의 말씀이 새삼스런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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