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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4월이 오면 '4월은 가장 잔인할 달'이라는 외국 시인의 시구(詩句)가 인구에 회자되곤 했다.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3·15부정선거를 자행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분연히 궐기한 1960년 4월 민주혁명에서 희생된 학생과 시민들을 기리고,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세사를 돌이켜 볼 때, 가장 잔인한 달은 4월이 아니라 6월이 아닐까? 지금부터 57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은 장장 3년 1개월이 지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막을 내렸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뿐이었고, 같은 민족이지만 강대국의 이해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때문에 시작한 전쟁은 온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피아의 시체가 계곡을 메우고 흘린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과 유엔군의 피해(전사·부상·실종 및 포로)가 47만9천여명이고, 민간인은 사망·학살·부상·납치·행방불명된 인원이 99만여 명에 달하는 등 150만에 가까운 인적 피해가 발생했으며, 물적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과 같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헐벗고 굶주린 채 M1 소총 한 자루에 목숨을 의지한 채 이름모를 산골짜기에서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려다 산화한 호국영령, 신체의 일부를 희생한 전상군경 등 6·25참전용사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했을까?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일어나 피와 땀과 눈물로써 가난을 물리치고 경제발전에 매진하여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이들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Freedom is not free' 라는 말과 같이, 자유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싸워서 쟁취하고, 이것을 지킬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따라서 전몰군경과 전상군경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은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써 항구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한 달을 '추모의 기간(1~10)'. '감사의 기간(11~ 20)'. '화합과 단결의 기간(21~30)'으로 나누어 기간별 특성에 맞는 행사를 추진한다. 우리 울산보훈지청에서도 제52회 현충일 추념식, 국가유공4형제 전사자 합동 위령제, 호국영령 천도제, 백골전우 위령제, 신불산전투 참전순국용사 위령제, 울산 청소년 백일장, 모범 국가유공자 포상, 제9회 경상보훈대상 시상, 대통령 및 장관 위문, 전적지 순례, 6·25참전용사 만남의 날, 전적기념탑 준공·제막식, 호국 한마음 시민걷기대회, 보훈의 달 음악회, 보훈가족 사랑의 집수리, 보훈가족 무료 진료, 제57주년 6·25기념식 등 다채로운 행사를 알차게 꾸려 나갈 것이다.
 어느 시인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서 이렇게 읊었다. '내 손에는 범치 못한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 이순신 같이, 나폴레옹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 나는 영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시(詩)를 그 자체로만 읽고, 이 시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우리 이웃의 전상군경과 전몰군경 미망인, 6·25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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