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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인 효자송도선생정려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앞면에는'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 뒷면에는 선생의 효행이 적혀있다.
 울산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한다. 충(忠)의 경우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이고장의 임란공신들을 들 수가 있다. 효(孝)의 경우는 효자 송도선생이 으뜸이다. 선생의 효심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야승>과 울산의 각종 읍지에 기록돼 있다. 1786년(정조10년)판
 <울산읍지>를 보자. 선생은 평소 학행에 힘쓰고 부모 섬기기에 소홀함이 없었다. 부친이 안질이 생겨 사물을 보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생원 시험에 합격하여 돌아오자 반가움에 두 눈을 떳다. 1년 간격으로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불가의 법을 쓰지 않고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제삿날이 돌아와도 가난하였기에 제수를 마련하지 못하였는데 꿩이 방으로 날아들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지극한 효심의 덕이라 하였다. 1899년(광무3년)판 <울산읍지>에는 정조10년판 <울산읍지>와는 달리 안질의 주인공이 어머니로 되어 있다.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비록 작은나라 이지만 송도같은 효자가 있다하여 홍문을 내렸다 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울산의 생원 송도는 부모가 다같이 숙환이매 10여년 동안 약 지어 간호하였다. 1년을 사이에 두고 부모가 다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지고 묘를 만들어 가례를 따르고 불가의 법을 쓰지 않았다.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이면 향을 피우고 절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세종은 비를 세워주고 정려각을 지어 선생을 표창하였다. 효문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문화재청 등의 해설에는 이 비석의 소재지를 우정동 276-39번지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찾아가면 흔적만 남아 있다. 금년에 북정동 350-1번지 동헌 뒤뜰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김 덕 균(전 울산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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